계란 99%는 좁은 철장에서 낳지만 긍정적 이미지 내세워 소비자 우롱
유럽은 껍질에 사육법 표시 의무화 "한국도 도입해 소비자 권리 높여야"
10일 경기 고양시의 한 대형마트. 50대 여성 박모씨가 유명 대기업의 브랜드 달걀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해당 제품 포장지에는 풀밭을 배경으로 ‘목초(木醋)를 먹고 자란 건강한 닭이 낳은 달걀’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는 “닭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낳은 계란인 것 같아 일반 계란보다 이 제품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오메가3, 비타민E 성분이 포함됐다는 설명과 함께 닭이 농장을 돌아다니거나, 짚바구니에 계란이 담긴 모습을 포장지로 쓴 제품 역시 인기가 많았다. 4살 아들을 둔 주부 신모(35)씨는 “영양소가 다른 계란보다 풍부하고 닭들도 사육장에서 잘 지냈을 것 같다”며 ‘두뇌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오메가3 함유 달걀을 골랐다.
그러나 송준익 천안연암대 축산학과 교수는 “브랜드 달걀의 포장 디자인은 소비자를 우롱하는 전형적인 상술”이라고 지적했다. 산란계(달걀 생산을 목적으로 사육되는 닭)의 사육환경이 포장지에 사용된 이미지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달걀에 산란계 사육방식을 표기해 소비자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과대 이미지 광고 속 브랜드 달걀
국내에서 하루 평균 생산되는 달걀은 3,800만개다. 그 중 동물복지농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산란계가 낳은 달걀은 1% 미만이다. 지난해 3월 기준 전국의 산란계 6,457만 마리 중 동물복지농장에서 사육된 닭은 50만마리(전체의 0.7%)에 불과하다.
나머지 99%의 달걀은 좁은 철장을 겹겹이 쌓아 올린 ‘배터리 케이지(battery cage)’에서 나온다. 대다수 브랜드 달걀도 이렇게 생산된다. 배터리 케이지 사육은 산란계 1마리를 A4 용지의 절반 크기 공간에 가둔 뒤 산란능력이 떨어져 도계장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2년간 끊임없이 알 낳기를 강제하는 방식이다. 동물학대 논란 끝에 2012년부터 유럽연합(EU)에서는 전면 금지됐다.
브랜드 달걀을 만드는 대기업 관계자는 “비용을 줄이면서 달걀을 대량생산하려면 배터리 케이지 방식이 효과적”이라며 “사료에 비타민 등을 넣어 달걀의 영양분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식품 대기업 관계자도 “공급 계약을 맺은 배터리 케이지 농가에서 달걀을 납품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브랜드 달걀 포장지에 초록색 풀밭을 배경으로 넣거나, 농장을 자유롭게 거니는 닭의 모습을 그려 넣어 마치 산란계가 쾌적한 환경에서 지내다가 알을 낳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산란계가 어떻게 사육되는지 알 방법이 없는 소비자는 포장지 이미지에 의존해 달걀을 고르게 된다.
독일 뮌헨수의대에서 산란계의 행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의사 이혜원(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정책국장)씨는 “기업들이 산란계 사육방법 표기를 의무화하지 않은 법의 허술함을 악용한 전형적인 과대광고”라고 지적했다. 국내에서 달걀을 판매하려면 포장지에 유통기한, 생산자명, 판매자명, 소재지, 내용량 등을 표기해야 하는데, 산란계의 사육방법을 나타내는 표시 기준은 마련돼 있지 않다.
A4 용지 절반 면적에 갇힌 삶
배터리 케이지는 달걀 생산에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닭에겐 그리 좋은 사육 환경이 아니다. 산란계 6마리를 보통 가로 세로 50㎝인 철장에 넣고 사육하는데, 닭 1마리에게 허락된 공간은 410㎠ 정도다. A4 용지의 절반 크기로 옴짝달싹 하기조차 힘들어 닭들은 지방간 출혈 증후군, 골다공증에 시달린다. 부리로 털을 고르거나 바닥을 쪼는 등 본능적인 행동을 하지 못해 그 스트레스로 다른 닭을 쪼아 죽이기도 한다. 이를 막기 위해 태어난 지 1주일된 닭의 부리를 절단기로 3분의 1가량 자른다. 이혜원 수의사는 “비좁고 폐쇄된 공간에서 사육하기 때문에 공기의 질이 나쁘고, 닭의 면역력도 낮다”고 말했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공장식 사육농장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산란율을 높이기 위한 강제 털갈이도 논란거리다. 닭이 알을 낳기 시작한 지 1년 뒤 털갈이를 할 때가 되면 산란율이 떨어진다. 이때 5~10일 동안 물과 먹이를 주지 않고 빛도 차단하는데, 이러한 스트레스 요법은 자연상태에서 최대 16주까지 걸리는 털갈이를 6~8주 안에 끝내게 한다. 그만큼 달걀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강제 털갈이를 거치는 과정에서 닭의 10~20%는 견디지 못하고 폐사한다.
소비자 선택권 보장해야
달걀을 고르는 건 개인 선택의 문제다. 다만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의 선택을 돕기 위해 산란계 사육방식 공개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럽ㆍ호주에서는 달걀 껍질에 사육방식, 생산국가ㆍ지역, 농장위치, 사육장 번호를 적도록 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산란계 사육방식을 유기농, 방사, 대형실내공간, 소규모 그룹 등 네 가지로 구분해 표시한다. EU가 금지한 배터리 케이지는 사육방식 표기에서 아예 제외된다. 독일 연방 식품농림부에 따르면 국내 동물복지농장과 비슷한 대형실내사육으로 생산한 달걀이 전체 소비량의 64%를 차지한다. 이어 방사 25%, 유기농 9%, 소그룹 사육 2% 순이다.
물론 지금도 동물복지 양계ㆍ양돈 농장에서 생산된 식료품에 동물복지인증 마크를 붙일 수 있다. 하지만 동물복지인증이란 용어가 생소해 동물인권에 관심 있는 소비자들도 친환경, 웰빙 등 익숙한 제품 홍보문구에 속아 배터리 케이지 산란계가 낳은 제품을 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송준익 교수는 “동물복지농장에서 생산한 달걀 뿐 아니라 모든 달걀에 산란계 사육방법 표기를 제도화 해 소비자들이 경제력과 신념에 따라 달걀을 고를 수 있도록 보장하고, 정부도 이를 적극 알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달걀 1구당 가격은 일반 달걀이 200원, 브랜드 달걀과 동물복지농장 달걀이 400~500원 선이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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