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ㆍ피로에 찌든 직장인들
점심시간에 식당대신 병원으로
30분~1시간 가량 맞으며 휴식
다소 비싸지만 정기권까지 팔려
“피곤한데 밥은 무슨… 주사나 맞을래요.”
10일 점심시간이 막 시작된 낮 12시쯤 서울 역삼동의 한 내과 주사실에는 시체처럼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직장인들이 즐비했다. 푹신한 침대와 선선한 에어컨 바람, 불 꺼진 조명 등 낮잠 자기 딱 좋은 환경에서 이들은 너도나도 팔뚝에 주사 바늘을 꽂고 있었다. 뾰족한 바늘을 타고 정맥으로 흘러 들어가는 노란색 액체의 정체는 바로 비타민 A부터 E까지 한꺼번에 들어간 종합비타민 액상이다.
스트레스와 피로에 지친 직장인들이 점심 메뉴를 고르는 즐거움을 포기한 채 병원에서 ‘영양주사’ 메뉴를 택하고 있다. 기업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서울 강남, 여의도 일대 병원들은 ‘비타민 주사’ ‘스트레스 주사’ ‘마늘 주사’ 등 각종 주사 목록을 구비해 놓고 피로 회복과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며 선전에 열을 올린다. 가격은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한 번에 5만~10만원 선으로 다소 비싼 편이지만 10회 정기권이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주사를 맞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가량. 이 때문에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병원으로 향한다. 여의도의 한 유명 내과 관계자는 “정기적으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녀가는 인근 직장인이 20명 가까이 된다”고 귀띔했다.
외국계 유통업체에 다니는 신모(31ㆍ여)씨는 이런 영양주사 애호가다. 과음한 다음날 숙취가 심한 체질 탓에 3년 전부터 주변의 권유로 주사를 맞고 피로가 가시는 체험을 한 뒤 과음이나 잦은 야근으로 몸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어김없이 점심시간에 병원을 찾는다. 신씨는 “업무를 보려면 단시간에 피곤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밥을 먹는 것보다 영양주사 한 방 맞는 게 낫다”며 “몸에 비타민도 공급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잠시나마 편하게 쉴 수 있어 만족한다”고 전했다.
병원을 찾는 이들도 주사의 효능보다는 휴식에 방점을 두고 있다. 쉴 공간이 마땅치 않은 회사와 달리 주사실에선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어서다. 국내 한 컨설팅 업체에서 3년 동안 일했던 김모(28ㆍ여)씨는 극도의 피로감을 느낄 때면 마지막 선택지로 영양주사를 찾는다. 김씨는 “회사 안에 누워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책상에 엎드려 자기도 눈치가 보인다”며 “편히 낮잠을 자고 몸에 좋은 주사도 맞는다는 생각에 병원에 들르곤 한다”고 말했다. 일부 병원은 이 같은 수요를 감안해 1인용 VIP실까지 두고 있다. 2시간에 1만원 정도의 추가 요금을 지불하면 다인실이 아닌 독립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다.
직장인들은 하루를 힘겹게 버텨내기 위해 ‘5만원짜리 휴식’에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다. 여의도 내 한 물류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유모(29)씨는 “하루 15시간씩 계속 일할 때가 많은데 주사 없이는 몸이 견뎌내질 못한다”며 “한창 바쁜 시기여서 조퇴하겠다는 말은 감히 나오지 않아 비싸지만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명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업무 강도는 높지만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줄 여건은 열악한 게 현실”이라며 “고단한 삶 속에서 피로 회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아 간편한 주사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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