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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 김] 어머니도 잘 몰랐던 '비밀 레시피'

입력
2015.06.1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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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걸리면 생각나는 음식들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닭고기로 육수를 내고 고기를 잘게 찢어 국수를 넣고 끓인 북미 음식 ‘닭고기 국수(Chicken Noodle Soup)’일 수도 있고, 달걀 노른자를 소주에 넣고 설탕이나 꿀과 함께 끓인 일본 음식 ‘달걀 술’일 수도 있고, 어릴 적 먹었던 음식이나 몸에 좋은 음식, 여행을 가서 정말 맛있게 먹었던 음식 등 각자 생각나는 음식들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이 아닐까. 나에게도 그런 음식이 있다. 너무나 흔하고 예측 가능한데, 어머니가 백미로 끓여 주시던 쌀죽이다. 밥알이 약간씩 보이는.

요리사가 웬 죽이냐고, 게다가 전복 내장을 참기름에 달달 볶아서 밝은 초록색을 띄는 전복죽이나, 우유로 끓이는 타락죽도 아닌 너무나 흔해서 죽 전문점에서도 잘 팔지 않는 ‘흰 쌀죽’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좀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어쩌랴, 감기에 걸리거나 몸이 아프면 흰 쌀죽이 생각 나는 것을.

북미 사람들은 감기에 걸리면 닭고기 스프를 찾는다. 게티이미지뱅크.
북미 사람들은 감기에 걸리면 닭고기 스프를 찾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 어머니의 흰 쌀죽이라고 다른 집보다 특별한 건 없었다. 다만 참기름은 함양 이모님이 보내주신 참깨를 동네 방앗간에서 직접 짜서 고소한 향이 온 집안에 퍼지던 그런 것이었다. 참기름을 조금 넣고 불린 쌀을 달달 볶은 후에 물을 붓고 타지 않게 주걱으로 천천히 저어주면 쌀이 풀어져서 죽이 돼가는 정말 흔하디 흔한 쌀죽이었다. 그 쌀죽에 일본산 연한 간장(아버지의 유일한 기호식품이었다)을 살짝 찍어 먹으면 정말이지, 아무리 심한 감기에 걸려도 한 그릇을 뚝딱 비웠던 기억이 난다.

내 유년기는 이민으로 외국에서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여러 사정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지독하게 춥고 눈이 많은 나라에 살면서 감기에 쉽게 노출됐다. 그래서 감기에 걸릴 때면 생각나는 그 흰 쌀죽을 끓여 먹었다. 그것도 어머니께 흰 쌀죽 끓이는 법을 여쭤봐 가면서. 하지만 솔직하게 정말 단 한번도 그 맛을 내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요리사가 된 후에도 말이다.

맛이 달랐던 건 이모님이 보내주신 참깨로 만든 참기름도 아니었고, 북미의 쌀이 한국과 같은 자포니카종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에서의 쌀과도 달랐고, 쌀 불리는 시간과 볶는 시간도 어머니와 달랐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레스토랑 오픈 준비를 하던 2004년 일이다. 매일 14시간씩 강행군을 한 덕분에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심하게 걸렸다. 때마침 어머니가 캐나다에 오셨을 때라 어머니가 흰 쌀죽을 쑤어 주셨다. 참기름은 한인 마켓에서 산 대기업 제품이었고 쌀은 캘리포니아산 ‘칼로스’였다. 쌀을 불리는 시간도 나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오묘하고 놀랍게도 십 수년 전에 어머니가 해 주시던 바로 그 맛이었다. 뭐가 다른 건지 어머니께 여쭤봐도 알려 준 그대로라고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점을 찾지 못했는데 죽 맛이 달랐던 이유를 요즘은 좀 알 듯 하다.

‘죽’이란 음식이 결코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눈을 떼면 바닥에 늘러 붙고 탄다. 반대로 너무 저어 버리거나 젓는 게 귀찮다고 쌀을 갈아버리면 풀처럼 된다. 또 중간중간에 물을 자꾸 넣으면 미음처럼 변한다. 그래서 죽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게 계속 저어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그 과정이 무척 지루하고 뜨겁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픈 자식을 생각하면서 꿈쩍하지 않고 힘든 과정을 견디셨기에 그 맛을 냈던 것 같다. 당신은 모르셨겠지만 그것이 내가 만든 쌀죽과의 차이였던 것이다.

요리사의 고리타분한 말 같지만, 역시 ‘정성’과 ‘시간’을 이길 레시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흰 쌀죽. 그러나 어머니의 요리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특별해 보이지 않는 흰 쌀죽. 그러나 어머니의 요리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어 이렇게 긴 서두를 적었다. 젊은이들은 ’정성’과 ‘시간’을 뛰어 넘어야 하는 벽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시간과 정성이라는 길 끝에 문이 있다고 여겨야 하는데 말이다.

정성은 그렇다고 쳐도 시간을 뛰어넘어 속성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젊은 요리사나 지망생들도 보면 인터넷으로만 보고 배우고 따라 할 뿐, 힘든 작업은 선호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음식이라는 것이 아무리 좋은 기계가 나와도 손으로 직접 친 머랭(거품을 낸 달걀 흰자)이 들어간 마카롱이 더 맛있고, 고온 압력솥으로 단시간에 찐 갈비찜보다 오랜 시간 졸여 만든 갈비찜이 더 맛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산 된장과 뒷방에서 몇 달간 뜬 된장의 차이는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크다. 젊은이들이 이런 걸 좀 알아줬으면 싶다. 그래야 정말 정성과 시간의 맛을 알 테니까.

오늘도 여전히 흰 쌀죽에서 너무 멀리 와 버렸지만 다들 여름감기는 조심하시길 바라며 흰 쌀죽 끓이는 레시피를 알려 드리겠다. 그리고 나도 내일은 어머니 댁에 가서 안 아프더라도 흰 쌀죽 한 그릇 해달라고 졸라야겠다.

재료: 쌀, 물, 참기름, 간장

1. 쌀은 2시간 이상 물에 불려 놓았다가 물기를 채반에 받쳐서 완전히 뺀다.

2. 냄비에 참기름을 약간 두른 후에 1번의 쌀을 약 1분 가량 중간 불에 볶는다.

3. 2에 물을 넣는다. 이때 물과 쌀의 비율은 6대 1 정도.

4. 센 불에 쌀과 물을 약 1분 가량 끓인 후에 중간 불로 줄여 저어준다.

5. 쌀이 완전히 풀려서 전분이 빠지면 불을 끈다.

6. 간장(일본식 양조간장 ‘기꼬망’)을 조금 곁들여 준다.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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