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15년(1520) 4월 4일. 중종은 조강(朝講)에 나가서 ‘속자치통감강목(續自治通監綱目)’을 강독하고 시강관(侍講官) 임추(任樞)와 시사에 대해서 토론했다. 이때 경기도에는 기근에다 지금처럼 전염병(?疫)까지 돌았다. 그래서 임추가 “기근이 극심한데 전염병까지 돌고 있습니다. 경기는 국왕의 정사가 먼저 미치는 지역인데, 외방보다 심하니 크게 우려 됩니다”라고 말했다. 중종은 “근일의 재변은 우연이 아니다”라면서 상하(上下)가 공구수성(恐懼修省)해야 한다고 답했다. 하늘을 두려워하며 몸을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조강(朝講)이란 아침에 신하들과 학문과 시사를 논하는 경연(經筵)의 일종인데 조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점심 때는 주강(晝講), 저녁 때는 석강(夕講)이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독서하는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 외에도 신하들과 자주 얼굴을 맞대고 현안을 논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제도이다. 영의정 등 삼정승이 경연의 영사(領事)가 되고 정2품 지사(知事) 및 종2품 동지사(同知事)가 각각 3명씩 6명, 정3품 참찬관 7명과 6명의 승지 전원, 홍문관 부제학이 경연 참석대상이었다. 이외에도 2품 이상의 관원 중에서 특별히 선발한 특진관(特進官)이 있었고, 특정 현안이 있을 때 담당 관리를 불러 토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연이 하루에 세 번씩 열리는 것이 원칙이므로 국왕이나 주요 관료들의 국정 현안이 무엇인지 모른다거나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사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정4품 시강관(侍講官)과 정5품 시독관(試讀官), 정6품의 검토관(檢討官)들이 경연에서 무슨 서적을 읽고 토론할 것인지를 미리 준비하는 실무진인데, 경연에서 나온 모든 말은 예문관 검열(檢閱)과 승정원 주서(注書)가 모두 기록으로 남기기 때문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하면 후대까지 망신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경연에는 쓴 소리 하는 것이 직업 의무인 대간(臺諫)도 참석시켰다. 국왕과 고위 관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쓴소리 듣는 것을 제도화한다는 취지였다. 밤에 하는 경연을 야강(夜講) 또는 야대(夜對)라고 불렀다. 중종 11년(1516) 사림계열의 전경(典經) 이약빙(李若?)이 중종에게 “‘야대(夜對)의 공(功)이 주강(晝講)보다 낫다’는 옛 사람의 말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밤중에 열리는 야강은 복잡한 업무에서 한 발 벗어난 시간에 열리므로 큰 틀에서 국정을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조강이 끝나면 아침 10시경부터 조회(朝會)를 하는데 조참(朝參)과 상참(常參)이 있었다. 조참은 한 달에 네 번 정전(正殿)에서 열리는 대규모의 정식 조회였고, 상참은 매일 열리는 약식 조회였다. 상참이 끝나면 윤대(輪對)를 했다. 윤대란 각 부서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국왕에게 직접 현안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 것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동반(東班ㆍ문관) 6품 이상과 서반(西班ㆍ무관) 4품 이상은 각각 관아의 차례에 따라 매일 윤대(輪對)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각 부서의 과장이나 그 이하 직급의 실무자들이 국왕에게 직접 현안을 보고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매일 보고하는 인원은 5명 이하로 제한했다. 윤대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기 때문에 인원이 너무 많으면 모든 현안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었고, 또 국왕의 건강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적 장치 덕분에 국왕은 국정의 모든 현안을 손바닥 보듯이 꿰뚫을 수 있었다. 중앙뿐만이 아니었다. 국왕은 지방으로 나가는 수령들을 직접 만나 지방의 현안을 청취하고 선정을 다짐받았다.
국왕직을 수행하는 것은 수도자의 자세와 같아야 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세종의 국정수행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상은 매일 사야(四夜ㆍ새벽 1~3시경)면 옷을 갖춰 입고 아침이면 조회를 하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그 다음 윤대를 하고 그 다음 경연을 했다. 한여름이나 극한(極寒)에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라고 일렀다.”(‘국조보감’ 세종 5년 조)
국왕의 모든 일과는 공개되었다. 정조는 “(임금의)움직임은 좌사(左史)가 쓰고 말은 우사(右史)가 썼는데, 임금은 숨기는 것이 없음을 보이고 모범과 감계(鑑戒)를 밝히려는 이유에서였다”(‘홍제전서’)라고 말했다. 모든 정사를 공개하므로 사(私)가 없다는 뜻이었다.
조선 같으면 장관들이 국왕과 대면보고를 못했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모든 국왕은 세자 시절 시강원에서 혹독한 국왕 수업을 받았다. 태종이 세자 양녕을 갈아치운 것처럼 고된 국왕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면 즉위할 생각을 말아야 했다. 새벽에 왕대비(王大妃) 문안으로 시작하는 조선 국왕의 하루는 신하들을 대면하는 것에서 시작해 신하들을 대면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하들을 대면하기 싫다면 처음부터 국왕이 될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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