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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양은 서울의 미래가 아니다

입력
2015.06.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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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정도 600년을 뽐내는 역사도시다. 시간의 더께와 그간 겪은 다양한 사건의 퇴적은 세계 여느 도시 못지 않다. 500년 왕조의 수도, 식민지 경험, 전쟁의 참화, 경제 기적 등이 한 장소에서 모두 일어난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서울 도심에서 우리는 그 역사를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도심을 즐긴다는 기분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한국전쟁으로 서울의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옹색하다. 잿더미에서 온전히 복구된 도시는 얼마든지 있다. 관건은 옛 건물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가 아니라, 도시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다.

서울시와 정부가 모두 역사도시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는 사대문 안 도심에서 여전히 머물 곳이 없는 것은 공공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 경복궁과 한양 성곽이 아무리 완벽한 모습으로 복원된다 해도, 이들은 바라보는 오브젝트, 담으로 둘러져친 유적으로 남을 뿐이다. 로마 황제의 유적과 바로크 도시계획은 여전히 현대 로마의 일상에서 작동한다. 동십자각은 개선문이 될 수 없다. 서울의 에너지는 과거가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영속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의 지층이 빚어내는 이질성과 긴장에서 생겨난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빈의 무지크페라인홀을 비롯해 우리가 여행길에 빠지지 않고 찾는 거의 모든 명소는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심에 모여 있다. 이 문화의 전당들은 예외 없이 계급투쟁의 결과로 시민들의 몫이 된 곳이다. 왕가와 귀족의 소유였던 장소를 시민 계급이 획득해 공공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옛 왕조 건물이어서 유서 깊은 것이 아니라 근대의 역동적인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고 오늘의 삶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소중한 장소들이다.

서울 도심에 공공 공간이 없는 까닭은 왕조의 재산을 시민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기업과 대사관, 관공서가 줄지어 들어선 세종로 육조거리 전체가 미술관, 미술관, 공연장으로 바뀌었어야 했다. 서울에 부족한 것은 새로 지은 한옥이 아니라 바로 이런 장소들이다. 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과 공연장이 모두 산 속에 박혀 있는 도시는 서울 말고는 없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예술의전당은 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급히 만들어졌기에 빈 땅을 찾아 변두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 다행히도 문화부 건물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기무사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바뀌면서 공공 공간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기획이나 운영은 아직 서툴고 존재감도 미흡하다. 여전히 이들로는 태부족이다. 솔직히 광장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광화문 광장을 서성이는 많은 사람들은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발길을 쉽게 옮기지 않는다.

그런데 서울시와 정부는 서울을 다시 왕조 시대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 여념이 없다. 최근 문화재청이 사직단을 복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을 철거하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지역 시민들의 문화공간이자 동시에 서울의 가까운 과거를 증언하는 두 도서관을 대안 없이 철거하면서까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을 되살리려 한다. 이번에도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 정기를 복원한다는 논리가 모든 논의를 원천봉쇄했다. 복원과 철거 어디든 동원되는 전가의 보도다. 사직단 복원은 우스꽝스런 또 하나의 한양 테마파크일 뿐이다. 멀쩡히 남아 있었다 한들, 현재적 의미가 전무한 사직단은 시민에 의해 전유되어 마땅한 유적이다. 공원으로 사용되는 지금의 기능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주안점을 맞추어야 한다.

왕조의 도읍지 한양은 시민의 수도 서울이 따라야 할 모델이 결코 아니다. 포즈를 취하려는 관광객이야 찾겠지만, 박제가 된 과거는 오늘을 풍성하게 하지 못한다. 사직단 복원은 동대문 운동장을 헐고 DDP를 세운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일이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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