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엘리엇)와 삼성그룹의 지분 확보 경쟁에서, KCC가 삼성물산 자사주를 전격 인수하며 삼성 측 백기사로 떠올랐다. 삼성 측이 합병을 무산시키려는 엘리엇과 일부 소액주주들에 대항해 자사주 매각이라는 초강수를 던지며 총력전을 펼치는 모양새다.
삼성물산은 10일 이사회를 열어 회사가 보유한 자사주 899만주(지분율 5.76)를 KCC에 매각했다고 밝혔다. 처분가액은 6,743억원으로, 주당 가격은 7만5,864원이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의 종가 7만5,000원을 약간 넘어선 가격이다. 삼성물산의 자사주 처분이 완료되면 우호 지분은 13.99%에서 19.75%로 늘어나게 된다. 자사주 상태로만 가지고 있으면 의결권이 없지만, 이를 우호주주에게 팔 경우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삼성물산은 보도자료를 통해 “우호적 지분 확대를 통한 원활한 합병을 진행하고 유동성을 확보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매각”이라고 처분 배경을 설명했다. KCC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중요성을 공감하고 이 같은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KCC는 제일모직 지분 10.18%를 보유한 제2대 주주인데, 합병이 무산되는 경우 제일모직 주주로서 받을 타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건축ㆍ기자재 산업을 운영하는 KCC가 삼성물산과 오랫동안 협력 관계였다는 점도 작용했다.
애초 삼성물산 측은 “자사주 매각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으나, 엘리엇 등 합병 반대 세력 공세가 치열해지고 합병비율의 부당성이 소액주주 사이에서 공감을 얻자 자사주를 팔아 우호지분을 확보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삼성물산 일부 소액 주주들은 네이버 카페 등을 통해 엘리엇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전날까지 67만주(0.43%)의 주식을 모아 합병 반대 쪽에 위임하기로 했다. 지분 2.05%를 보유한 일성신약은 엘리엇과 연대하지는 않지만 합병 비율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삼성 측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주주총회 안건 분석기관인 서스틴베스트는 “합병안은 삼성물산의 일반주주 지분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삼성물산의 주가순자산비율(PBR) 수준이 역사적 최저 수준인 시점에 합병 비율이 산정됐다”며 9일 기관투자가들에게 합병안에 반대할 것을 권고했다.
일단 KCC가 삼성 쪽의 백기사로 나서면서 삼성물산을 둘러싼 표 대결은 삼성 측에 유리해진 상황이다. 그러나 이번 자사주 매각 자체가 법률적 이슈로 부각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기업 경영권 분쟁에 밝은 한 변호사는 “평상시라면 이사회 결의만으로 자사주 처분에 문제가 없지만, 경영 분쟁 상황에서는 다른 주주에게 매수 기회를 주지 않고 이사회가 일방적으로 한 곳에 팔 수 없다는 하급심 판례도 있다”고 말했다. 주주총회 소집통지 및 결의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엘리엇이 이번 자사주 매각과 관련한 가처분신청 등 법적 분쟁을 이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과 KCC간에 모종의 이면계약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통상 자사주 매각 시 가격을 소폭 할인해주는 것과 달리 시가에 거의 맞춘 것은 향후 엘리엇 측이 배임 책임을 묻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경영권 분쟁으로 주가가 급등한 상황에서 KCC가 아무런 대가 없이 백기사를 자처했겠느냐는 것이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실제 합병 발표 전과 비교해보면 이날 주가는 2만원 가량 상승해 KCC가 1,800억원 가량의 추가 비용을 지불한 셈”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이면계약은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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