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출판사 프로파간다의 편집 실험
건국이후 사이버사령부 댓글까지
기법·연루된 인물 삽화 곁들어 정리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이라니, 제목 한 번 산뜻하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에서 나타난여러 부정선거 기법과 사건 등을 그림을 곁들여 알기 쉽게 정리한 도감이다. 기법과 사건 편, 인물 편으로 돼 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 고색 창연한 부정선거 기법부터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벌어진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 트위터 여론 조작, 사이버사령부 댓글 의혹 사건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인물 편은 부정선거에 앞장선 인물과, 부정선거를 고발하거나 저항한 인물을 망라했다. 이승만의 부통령 이기붕 같은 옛날 인물부터 2012년 제 18대 대통령 선거 때 활약해서 지금도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까지 챙겼다.
책 맨 뒤에는 부정선거 고사 문제지가 실려 있다. 문제는 사지선다형이다. 11번 문항을 보자. (부정선거 기획 및 공작의 대표적인 유형을 예시한 뒤) 우리나라 선거 역사에서 수십 년간 이런 활동을 수행한 정부 기관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간첩을 잡기도 하고, 조작하기도 한다. ②‘음지에서 일하며 습지를 지향한다’는 부훈을 가지고 있었다. ③기관의 소재지였던 곳을 지칭해 ‘남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④2012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트위터를 통한 여론전에 가세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얌전해 보이지만 뼈가 박혔다. 이런 종류의 뼈를 일러 ‘반골’이라 한다.
손바닥 만한 작고 얇은 책이 생김새도 별나다. 흔하디 흔한 책날개가 없다. 종이는 제일 싼 것으로 썼다. 본문 모양새도 남다르다. 종이를 잘못 재단했나 싶게, 첫 줄은 위로 바짝 붙고 맨 아랫줄 밑으로는 여백이 넉넉하다. 머리카락을 팽팽하게 잡아당긴 느낌이랄까. 게다가 본문 활자는 고집 세고 단호해 보이는 견출고딕체. 그로 인한 긴장감이, 아, 상쾌하다. 거기에 단순하지만 잘 정리된 삽화까지.
이 독특한 책을 만든 출판사는 프로파간다. 2007년 계간 ‘그래픽’이라는 잡지로 출발해 2012년부터 단행본도 내고 있는 곳이다. 영화잡지 편집장 출신으로 기획, 편집, 영업까지 도맡아 뛰고 있는 김광철(52) 대표와 회계 담당 직원 1명의 사실상 1인 출판사다. 출판사 간판으로 ‘선전, 선동’을 내걸다니, 에둘러 말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리겠다는 의지의 표시인가. 주장하지 않는 척 점잔 빼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다시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으로 돌아가자. 출간 소식을 접한 한 블로거는 “패기 쩌는 책”이라고 칭송했다. 발빠르게 읽은 독자들이 SNS에 올린 독후감은 대체로 “웃겨서 빵 터졌다”고 감탄하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한 책이겠다.
부정선거 기법이나 주범을 규탄하는 책은 아니다. 아주 건조하게 서술했다. 김 대표가 말했다. “부정선거가 나쁘다는 건 다 아는데, 설교할 필요가 뭐 있나. 판단은 독자가 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슬그머니 뼈를 박긴 했다. “십수 명의 인원만으로 특정 기사나 의견을 천만 단위로 트윗ㆍ리트윗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고효율ㆍ저비용’ 부정선거 기법”(국정원의 트위터 여론 조작) 같은 설명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편집부 지음’이라고 밝혔지만, 대표 김씨가 혼자 쓰고 만든 책이다. 김 대표는 딱딱하고 무거운 주제를, 유머러스하고 경쾌하게 다뤄보자고 해본 ‘편집 실험’이라고 설명했다.
무슨 배짱으로(지금이야 이런 책 낸다고 잡아가는 세상은 아니라고 믿지만) 이런 책을? 김씨는 “심오한 뜻은 없다”며 “아직까지 (기관 같은 데서) 전화 온 건 없다”고 말했다. “이런 책도 낼 수 있다는, 출판의 다양성을 염두에 둔 행위(자못 숭고하다)이자 스스로 그런 가치를 내면화하기 위한 책이다”고 말했다.
프로파간다는 기존 출판 관행에서 벗어난 독특한 책을 만들어왔다. 연간 10~15종의 단행본을 내는데, 그 목록이 좀 튄다.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라는 장엄한 카피가 달린 ‘연필 깎기의 정석’, 혼자만의 공간에 숨고 싶은 어른을 위한 ‘비밀기지 만들기’, 대중문화에 등장한 좀비를 총정리한 ‘좀비사전’, ‘공포영화 속 아비규환에서 살아남기 완벽 가이드’를 표방한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 등등. 흔히 ‘독립출판’이라고 부르는, 다분히 ‘덕후적’이고 삐딱한 책들이다.
책의 주제, 형태, 영업, 홍보, 모든 면에서 남들 하는 대로는 안 한다. SNS 홍보 같은 건 거의 안 한다. 다들 너무 홍보에 신경 쓰는데, 꼭 그래야 하나 싶단다. 이번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은 언론에 보도자료조차 안 뿌렸다. 출간을 알리면 반색할 신문사가 떠올랐지만, “아부하는 것 같아 싫어서”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SNS로 독자들이 알아서 소문을 내고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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