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시대 상징 스가모 상점가, 일찌감치 쇼핑 나온 노인들로 북적
연금 만으로 살기 힘들어, 여유 있는 생활 위해 일하고 싶어 해
65~69세 고용률 39년 만에 최고, 일하는 노인 늘어 소비부양 기대도
도쿄역에서 JR 야마노테선(山手線) 전철을 타고 20분간 달리면 스가모(巢鴨)역에 도착한다. 일명 ‘할머니들의 하라주쿠(原宿)’로 불리는 스가모 지조도리(巢鴨地臟通) 상점가다. 도쿄 시내 젊은이들의 패션 거리는 하라주쿠지만 이곳은 노인들에게 필요한 각종 상점과 편의시설이 모여있어 일본의 고령화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휴일을 맞은 지난 7일, 스가모 지조도리는 오전 11시였지만 새벽잠이 없는 노인들로 일찌감치 북적대고 있었다. 스가모역에서부터 노인들을 위한 배려가 눈에 띈다. 지하철 노선안내와 지도가 다른 역보다 큼지막하게 확대돼있고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도 다소 느리다.
도쿄의 ‘노인들의 하라주쿠’
이날은 지역상인회가 준비한 마쓰리(축제)의 날. 800여m의 기다란 거리 양쪽에 옷가게, 잡화점, 요통ㆍ변비약을 선전하는 건강식품점, 채소가게, 건어물 가게, 골동품 가게 등 200여 점포가 늘어서 손님들을 환영하고 있다. 외출의 필수품인 지팡이나 찬바람에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모자 가게에 유독 손님들이 많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가게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대부분의 상점이 문턱을 없앴다. 이곳 역시 가격표가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써있고, 거리 곳곳에는 의자가 놓여 피곤한 다리를 잠시 쉬어 가도록 해준다. 다른 축제와 달리 시끌벅적한 소음이 별로 없는 게 특징. 노인들이 복잡하고 어수선하게 느끼지 않도록 정갈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풍경이 인상적이다.
한쪽 옆으로 가면 고간지(高若寺)라고 씌어진 절이 눈에 띈다. 관광객이 몰려있는 이곳은 1592년 세워진 유명한 사찰이다. 장수를 기원하는 영험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고 소문나면서 도쿠카와(德川) 시대부터 할머니들이 각지에서 찾아왔다고 한다. 불상에 물을 붓고 열심히 닦으면 자신의 몸에서도 아픈 그 부분이 좋아진다는 전설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노인들이 차례대로 불상의 어깨며 허리며 손수건으로 열심히 닦고 있었다. 향불 앞에선 한 할머니가 기자에게 “연기를 듬뿍 머리 쪽에 접하면 두뇌가 좋아진다”며 연기를 마실 것을 강권했다.
가게 점원들도 할머니들이 대세
거리 중간쯤 가면 속옷과 양말, 손수건 등이 온통 빨간색투성인 내복 전문점이 나온다. 화려하게 붉은색을 입으면 건강해진다는 속설에 할머니들이 자주 찾는 관광명소다. 이곳에서 일하는 매니저인 야지마 아끼코(矢島草子)씨 역시 65세다. 야지마씨는 “일본의 요즘 노인들은 80대라 하더라도 70대로 보일 만큼 젊다”며 “과거에는 노인들에게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헐렁한 옷이 많이 팔렸지만 지금은 노인 복장이 따로 없을 만큼 젊은 취향 옷들이 많이 나간다”고 소개했다. 야지마씨는 매장판매뿐 아니라 판매전략을 기획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연금을 받는 노인이지만 일을 왕성하게 하면서 오히려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보통의 직장인과 다름없이 아침 9시45분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주 5일 근무를 소화하고 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내가 속한 의류회사는 정년이 없고 지금이 가장 바쁘다”며 “바쁘니까 늙지 않고 체력도 더 좋아지는 느낌”이라고 활짝 웃었다. “경기가 침체돼 연금만으로 살기엔 생활이 힘듭니다. 조금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기 위해 건강만 허락한다면 평생 악착같이 일을 할 작정입니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는 싫어요. 1년에 한번 온천 보내주는 것 외에 오히려 내가 자식들에게 보태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야지마씨는 일을 하면서 연금도 받고 있다. 그는 “연금제도가 바뀌는 중간세대라 63세 때부터 받아왔다”며 “지금은 근로소득이 있어서 연금을 내면서 받는 시기이고 70세부터는 연금을 받기만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야지마씨의 한달 수입은 20만엔(약 180만원). 이 중 1만5,000엔을 연금으로 내고, 회사에서 별도로 1만5,000엔을 보조해 준다. 연금에만 매달 3만엔이 나가는 셈이다. 반면 매달 받는 연금액수는 12만엔. 그는 “일하는 고령자 증가로 세금도 더 거두게 될 테니 연금제도나 재정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평가했다.
5명중 2명이 ‘일하는 연금세대’
이처럼 일본에선 연금 받으면서 일하는 고령자가 뚜렷한 증가세다. 일본 총무성의 최근 노동력 조사에 따르면 65~69세 고용률은 2014년 40.7%로, 전년대비 1.8%포인트 늘어나 3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5명 중 2명이 ‘일하는 연금세대’인 것이다. 65~69세 남성의 고용률은 51%로 16년 만에 절반을 넘어섰고, 여성도 31%로 처음 30%선에 진입했다. 60대 후반의 취업인력이 374만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50% 증가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에 따르면 고령자 취업 직종도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일하는 노인의 대부분이 자영업자였지만 최근에는 유통, 간병, 제조업 등 전통적으로 구인난에 시달리는 업계로 퍼지고 있다. 대형 소매점의 확대나 농업 쇠퇴의 영향이 적지 않다. 중소상점을 운영하거나 농업으로 소득을 올리는 자영업자 부류가 30%이하로 줄어든 반면, 회사나 정부기관 및 단체에 소속돼 돈을 버는 노인이 주류로 등장하고 있다. 유통업 종사자가 8만명 늘어 최대 증가폭을 보였으며, 의료와 간병분야가 7만명, 제조업이 6만명, 숙박과 요식업이 5만명, 건설업에서 4만명이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65세가 지나도 남편과 부인이 서로 일하는 맞벌이 고령자 세대까지 늘고 있다. 총무성에 따르면 지난해 4~6월 ‘맞벌이 시니어’는 전년 대비 11.9% 증가한 66만가구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노인부부 8가구 중 1가구가 맞벌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층에겐 취업 경쟁상대? 그들도 노인된다!”
일하는 노인이 늘어나면서 소비부양 효과도 기대되고 있다. 노인들은 젊은 세대보다 소비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분석에 따르면 60세 이상 일본인은 소득의 90%를 소비에 쓰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노후를 걱정해 저축에 신경 쓰는 59세 이하 일본인은 소득의 70%만 소비에 할애한다고 한다.
일손이 부족한 기업에는 경험이 많은 노인층이 큰 보탬이 된다. 일용품 도매업체인 팔탁(Paltac)은 지난해 10월부터 시간제근무자를 포함해 7,400여명 적 직원에 대해 재고용 기간을 65세에서 70세로 상향 조정했다. 간호사업체인 케어21은 지난해 4월부터 정년을 아예 폐지해 체력과 의욕만 있으면 얼마든지 계속 일하도록 보장했다. 특히 편의점 체인 로손에 따르면 일본 내 전국 지점에서 일하는 파트타임직 약 20만명 중 60세 이상만 1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로손 측은 “노동인구가 감소하는 지금 건강하게 일하는 노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하는 노인이 늘어나면서 젊은 세대들의 경계심도 표면화하고 있다. 한 취업사이트 게시판에는 “일하는 노인 증가는 젊은이들의 일자리 침해로 이어진다”는 의견에서부터 “저임금으로 일하는 노인이 많아지면 노동시장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얘기까지 다양한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 “생계를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하는 일본은 불행한 나라”“연금만으로 살아가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이제 ‘간반 오바상(간판 할머니)’(가게 앞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내세운 미모의 여점원인 ‘간반 무스메’를 빗댄 말)도 등장할 판”등의 비꼬는 말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초고령 사회인 일본에서 일하는 노인의 증가는 피할 수 없는 대세다. 스가모 거리에서 도쿄역 근처로 돌아온 뒤, 우동집에서 만난 60대 후반 할머니 점원의 말이 인상에 남는다. “젊은 세대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노인이 되지 않습니까. 자원봉사나 취미활동도 재미있지만 돈을 직접 버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내 스스로 생활비를 버는 게 건강과 자신감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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