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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아려오는 멸치 한 박스의 추억

입력
2015.06.0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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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음식을 만드는 셰프들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음식은 무엇일까? ‘나’를 요리의 세계로 끌어들였던 음식, 요리를 그만두고 싶게 만들었던 음식, 혹은 만들 때마다 셰프가 되길 잘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오는 음식…. 셰프들이 털어놓는 음식 이야기 ‘오! 마이 푸드’를 수요일 라이프면에 격주 연재한다.

지중해식 멸치 요리. 박찬일 셰프 제공
지중해식 멸치 요리. 박찬일 셰프 제공

며칠 전, 주방 후배가 말했다.

“선배, 멸치 좋던데 신메뉴 하나 하죠?”

알아, 안다고, 나는 새벽에 수산시장을 보는 처지라 멸치 좋은 줄 모를 리 없다. 흔히 산지에서 멸치축제를 하는 봄을 멸치 철로 아는데, 5월이 되어야 씨알이 굵어지고 맛도 좋다. 이탈리아 요리에서 멸치는 빠지지 않는다. 소금 쳐서 담근 후 기름에 보관하거나, 생멸치를 그대로 요리하기도 한다. 지중해는 멸치 요리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북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가 다 멸치 요리를 즐긴다. 멸치는 그대로 감칠맛 덩어리이고, 소금을 치면 마치 우리나라 젓갈처럼 맛이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멀리 로마시대에도 이미 멸치젓은 가장 중요한 반찬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강력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이른바 멸치 생인손. 요리사에게 손가락은 칼보다 중요한 ‘도구’다. 칼을 쥐고 하는 요리보다 맨손으로 뭔가를 주무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생인손을 앓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한국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멸치를 쓰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탈리아는 봄가을 제철만 되면 멸치 요리가 지천이다. 16년 전, 저 멀리 지중해의 한 식당, 견습생인 내가 있었다. 매일 멸치를 한 박스씩 다듬던 내가. 아침에 사장이 시장에 다녀오면 나를 불러 멋진 나무 상자를 안겼다. 반짝거리는 멸치가 가득 들어 있는. 어차피 하루 할 일이 지천인 막내 요리사에게는 멸치 한 박스는 일종의 고통스러운 보너스였다. 멸치 다듬기의 정석이 있다(생각만 해도 괴롭다). 먼저 작은 칼로 비늘을 대충 털어낸다. 날을 세운 숟가락이나 굴 칼로 몸통을 떠내듯 긁어낸다. 이건 좀 큰 멸치의 경우이고, 작은 놈들은 일일이 손으로 손질해야 한다. 몸통을 벌린 후 엄지를 세워서 등뼈 사이로 넣고 쭉 밀어내면서 살점을 떠낸다. 쉬워 보이지만 멸치 살이 연해서 뭉개지고 찢어지면서 온전하게 살점을 얻어내기 힘들다. 간혹 등뼈가 굵은 녀석들이 있어서, 가시가 손가락에 쿡쿡 박혔다. 한 박스를 다 손질하면, 손톱 사이에 밴 멸치냄새를 지우느라 뜨거운 물에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곤 했다(지금도 내 손가락에서 그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엄지손가락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이 아닌가. 손톱 반월 무늬쪽 위로 가시가 박힌 듯 붉게 부풀어오르고 통증이 있었다. 대충 싸매고 하루 더 일하고는 자리에 누웠더니 기어이 사달이 났다. 피고름이 흐르고,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째고 수술을 해야 한다나.

“요리는요?”

“(별 이상한 놈 다보겠다는 표정으로) 얘야, 열흘은 주방장 생활을 하렴.”

“주방장이요? 난 주방장이 아닌데요.”

“그러니까, 주방장처럼 손가락으로 지시나 하면서 지내라고.”

하루가 아쉬운 견습생에게 열흘간이나 주방에서 빈둥거리라고? 게다가 하늘같은 선배들이 우글거리는 주방에서 막내가? 바짝 얼어서 가게에 돌아가 보고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주방장이 처분을 내렸다.

“멸치는 손질하지 말고, 당분간 버섯을 손질하게.”

라텍스로 만든 손가락 보호대를 던져주며 그가 한 말이었다. 며칠 전 사들인 버섯이 한 트럭 창고에 있었다. 멸치에서 해방되니, 버섯이 달려들었다.

다시 16년 후 지금 서울, 내가 일하는 식당의 주방. 기어이 멸치 한 박스가 왔다. 나는 모른 척, 손가락으로 지시만 했다. “멸치 가시 조심하렴. 독하단다.”

박찬일/ 로칸다 몽로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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