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ㆍ이종범ㆍ최희섭ㆍ오승환…
미국ㆍ일본 등 이긴 감동의 순간 함께한 선수들 사인 빼곡히
한국 야구의 역사는 2006년 3월 열린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전과 후로 나뉠 만큼 당시 야구 열기는 단군이래 최고조였다. 월드컵 축구에 맞서 프로선수들이 총출동하는 세계 야구대항전의 관심은 시작 전부터 뜨거웠다. 김인식(한화) 대표팀 감독의 주도 아래 한국은 박찬호(샌디에이고)와 이승엽(요미우리)을 포함해 국내외 스타플레이어를 총집결 시켜 최정예 멤버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박용택(36ㆍLG)도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프로 5년 차였던 박용택은 LG에서는 간판 선수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태극마크를 다는 일은 꿈만 같았다. 함께 선발된 외야수들은 팀 선배 이병규를 비롯해 이종범(KIA), 송지만(현대), 이진영(SK) 등 타격에는 일가견이 있는 대선수들. 박용택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좁아 보였지만 27세의 한창 나이였던 그는 뒤지지 않는 타격 실력과 전년도 도루왕(43개)에 오른 기동력을 앞세워 김인식호에 승선했다.
지난 5일 잠실구장에서 만난 박용택은 “프로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국가대표일 것”이라면서 “벅찬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태극마크”라고 말했다. 박용택은 이후에도 팀 내에서는 더욱 출중한 성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했지만 2008 베이징올림픽과 2009년 2회 WBC,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치열한 국가대표 경쟁률을 뚫지는 못했다.
그 때 썼던 푸른 색 헬멧은 그래서 박용택에겐 더욱 소중하다. 헬멧은 온통 야구선수들의 사인으로 도배가 된 상태. 이종범(KIA) 최희섭(LA 다저스) 구대성(한화) 오승환(삼성), 그리고 박찬호까지…. 전 국민을 들끓게 했던 감동의 주역들 이름과 사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박용택은 “선수들도 첫 대회라 너무 신났고, 신기해했다”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서로의 헬멧에 사인을 주고 받았다”고 떠올렸다. 박용택은 중국과 1라운드 경기에서 1타점 3루타를 치며 10-1 대승에 일조했다. 한국은 여세를 몰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1라운드 일본전에서 8회 터진 이승엽의 극적인 역전 투런홈런을 앞세워 3-2로 승리했고, 미국으로 장소를 옮겨 치른 2라운드에서도 메이저리거가 포함된 멕시코(2-1), 미국(7-3), 일본(2-1)을 완파하고 파죽지세로 준결승까지 올라 세계 야구 4강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대회를 마치고 소속팀 LG로 돌아온 박용택은 타율 2할9푼4리에 16홈런, 64타점, 25도루로 국가대표의 기운을 이어갔다. 박용택은 “그라운드 밖에서도 박찬호 선배부터 막내 급이었던 김태균까지 모두 함께 어울리며 친해진 계기였다”면서 “원래 기념구나 장비를 챙기거나 간직하지 않는 편인데 이 헬멧만큼은 고이 모셔두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총액 50억원에 LG에 잔류한 박용택은 이병규(9번)와 이진영 등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빠진 와중에 고군분투하며 부진한 팀 분위기 반등에 앞장서고 있다. 타율 2할9푼2리에 25타점, 홈런은 벌써 8개로 개인 한 시즌 최다홈런(2009년 18개) 경신이 유력하다. 이병규가 일본에 진출했을 때도, 이진영이 SK에서 이적해 오기 전에도 늘 혼자 LG의 암울한 시기를 버텨 왔던 박용택은 지금도 외롭지만 내색하지 않고 후배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힘이 되어 주는 건 지금은 은퇴한 이름들이 더 많은 빛 바랜 푸른색 헬멧이다.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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