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글쓰기 훈련법으로 부상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의 평안을 찾아보세요.”
요가학원 홍보 문구가 아니라 책 표지 위에 쓰인 글이다. 책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는 첫 번째 방법은 당연히 ‘읽기’겠지만, 이 책들이 권장하는 건 ‘쓰기’다. 좋은 글을 찬찬히 따라 쓰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어쩌면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글쓰기의 본능을 일깨울 수도 있다는 것.
최근 서점가에 필사 책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왼쪽 면에 시나 소설, 경구를 배치하고, 오른쪽 면은 비워 놓아 독자들이 필사할 수 있게 디자인한 게 특징이다. 지난해 ‘안티 스트레스’를 표방하며 크게 인기를 끌었던 색칠놀이 책에 이어 이번엔 쓰기 책이 ‘힐링’의 대안으로 등장했다.
“시에는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생각을 넓히는 힘이 있죠. 시를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또 달라요. 쓰면 마음에 새겨집니다.” 시 필사 책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위즈덤하우스)를 펴낸 김용택 시인은 책을 내기 오래 전부터 시 베껴 쓰기를 해왔다고 한다. 어수선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시 필사를 떠올렸다는 그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를 시작으로 틈날 때마다 시를 따라 쓰고 있다. 이번 책에는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이성복 ‘남해 금산’, 신달자 ‘그리움’, 파블로 네루다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등 시인 자신의 필사 경험을 바탕으로 선별한, 따라 쓰기 좋은 시 111편이 수록됐다.
지난달 출간된 ‘명시를 쓰다’(사물을봄)도 시 필사를 통한 마음의 정화를 표방한다. 김소월, 이육사, 윤동주 등 근대문학의 거장 시인 열 명의 작품 53편을 가려 실은 뒤 필사할 수 있는 공간 외에 시를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하는 난을 따로 만들었다. 출판사는 “쓰기는 읽기보다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 의도치 않은 틈을 발생시킨다”며 “그 틈을 통해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작품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첫 필사노트’(새봄출판사)는 김유정 ‘봄봄’, 이상 ‘날개’ 등 단편소설 필사를 위한 시리즈 책이다. 출판사가 스트레스 해소 외에 내세우는 또 다른 효과는 글쓰기 훈련. 글 잘 쓰는 방법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보다 체험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작문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것이다.
네 명의 젊은 시인이 참여한 ‘너의 시 나의 책’(아르테)은 시 중간중간을 여백으로 비워 놓고 독자가 문장을 직접 완성할 수 있게 한 이른바 ‘DIY 시집’이다. 박준, 송승언, 오은, 유희경씨의 시 60편이 수록됐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 ’라는 말보다”처럼 비워 놓은 칸에 독자가 원하는 말을 집어 넣어 자신만의 시를 만들 수 있다.
스트레스 해소와 힐링이 중요한 화두인 요즘, 필사라는 오래된 자기 수련법이 재부상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책에서 멀어진 세태를 반증한다는 분석도 있다. 읽기에 익숙지 않은 독자가 늘어나면서 출판사들이 그리기나 쓰기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돌파구 찾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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