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체류 나흘째부터 감기몸살을 앓았다. 대낮 햇살은 건물들의 뼛속까지 우려낼 정도로 맑고 투명하지만 해가 지면 이내 찬바람 부는 날의 연속이었던 탓. 바이러스가 얼쑤 하고 틈입할 만하다. 이틀을 꼬박 으스스 떨고 났더니 어느새 지난밤부터 감쪽같은 한여름 날씨로 변했다. 감기는 여전한데 볕은 따가우니 시간 별로 몸이 스스로에게 이물감을 느끼는 듯싶다. 많이 찌뿌드드하고 몽롱하지만, 그 몽롱함이 오묘해 혼자 시간을 쪼개 낯선 거리를 걸었다. 온몸이 표백될 정도로 부신 햇살 아래 떠돌다 보니 흡사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존재감이 지워진다. 마주치는 백인, 흑인, 아랍인, 동남아인들 눈에 내가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환각도 느껴진다. 그러면서 홀연 이질감이나 두려움 따위가 사라지고 이곳에선 무엇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고, 심지어 그들을 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도 있겠다는 용기마저 생긴다. 그래, 더 어깨를 곧추 세우며 큰 걸음으로 걷는다. 센 강의 푸른빛이나 노트르담을 비추는 햇빛이 문득 세상에서 처음 맞는 푸름이자 광휘인 것만 같다. 자신에게서마저 스스로를 지워버리니 낯섦이 외려 안락의자 같고 불통이 새로 깨우친 언어의 첫 마디 같아진다. 익숙함은 그 동안 얼마나 스스로를 두려워하고 움츠리게 만들었던가. 이곳에서 그냥 바이러스가 되어 살 수 없을까. 해를 본다. 다른 세상의 눈부신 흑점 같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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