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모금으로 7년 만에 빛보는
영화 '연평해전' 개봉 앞두고
생존자·유족 시사회서 회한·오열…
당시 갑판장이었던 권기형씨
"죽은 의무병 동혁이가 어른거려…"
유족들 "국민들이 기억해줬으면"
한일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떠 있던 2002년 6월 29일, 서해 앞바다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기습포격으로 시작된 남북 간 교전이 25분이나 계속됐다. 우리 해군 6명이 스러진 이날의 참사는 훗날 ‘제2연평해전’으로 명명됐다.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지 13년이 다 되어 간다. 매년 이 맘 때쯤이면 희생자를 기리는 행사가 열려왔지만 올해는 당시 생존자와 유가족에게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24일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제작비 조달이 어려워 시민 7,000여명이 온라인에서 십시일반으로 9억여원을 모금하는 등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장장 7년이 걸린 영화다.
지난 1일 저녁 서울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한 권기형(34)씨는 영화 상영 내내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켰다. 그는 연평해전 당시 북한군의 포격으로 침몰한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갑판병이었다. 5일 다시 만난 권씨는 “그저 감사하다”며 한 맺힌 첫 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나 고마움을 표한 말과 달리 그는 지금도 전투의 악몽과 싸우는 중이다. 새하얀 제복에 반해 해군이 된 권씨는 교전 당시 함교 소총수 임무를 수행하다 적 기관포에 왼손을 관통 당했다. 대수술로 절단된 손가락들을 겨우 접합했지만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피부이식으로 팔목에는 어른 손바닥만 한 흉터도 훈장처럼 남았다.
다친 손은 내내 걸림돌이 됐다. 권씨의 꿈은 경찰, 소방관으로 근무하며 한평생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었다.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았으나 국가유공자 채용에서마저 면접관들은 ‘그런 손으로 일이나 제대로 하겠느냐’는 무언의 핀잔을 보내곤 했다. “총을 맞고 (보상금을) 얼마나 받았느냐”는 잔인한 질문도 가슴을 후벼 팠다. 그래서 2006년 무작정 한국을 등지고 호주로 도피 아닌 도피를 하기도 했다. 권씨는 고달팠던 13년의 삶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다만 “지금은 방위사업체에서 일하고 있고, 연말에는 예쁜 아가씨와 결혼도 한다”며 “교전 장면을 마주하기가 두렵기도 했지만 영화가 나와준 것만으로도 참전 장병들에게 큰 선물이 됐다”고 말했다.
영화는 조타장 고 한상국 중사의 아내 김한나(41)씨에게도 숨진 남편을 잠시나마 추억하는 위안이 됐다. 한 중사는 배가 가라앉을 때까지 조타기를 지키다 실종됐다. 김씨는 “남편을 잃은 충격에 건강이 악화돼 담낭제거 수술을 받고, 공황장애와 우울증까지 겹쳐 정신과 신세를 져야 했다”면서도 “영화를 보면서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마워했다.
연평해전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매년 6월이 되면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각종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잦아서다.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날의 교훈을 알리고 싶어 꼬박꼬박 참석한다고 했다. 포탄에 오른쪽 다리를 잃고 현재 대전 합동군사대 해군대학 교관으로 복무 중인 부정장 이희완 소령은 “몸은 불편하지만 군인으로서 매우 명예롭다”며 “국방의 의무를 수행 중인 후배들이 생에 통틀어 가장 근엄하고 신성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점을 알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순국선열에 대한 합당한 예우는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유가족들의 생각이다. 정장 고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74)씨는 “‘짧은 인생 영원한 국가’라는 말처럼 최전선에서 조국에 헌신한 주체는 언제나 젊은이였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김한나씨는 “선진국에서 군인, 경찰 지원자가 많은 이유는 그만큼 국가가 명예를 제대로 지켜주기 때문”이라며 “이런 풍토가 조성되지 않는다면 더는 나라를 위해 몸 던질 청년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기형씨는 사건 당일이 다가오면 “죽은 동혁이(의무병 고 박동혁 병장)와 고속정 갑판이 어른거린다”고 말했다. “당시 전투는 저와 동혁이의 꿈을 앗아간 비극이었지만, 그 시간이 잊혀진다면 ‘제3연평해전’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습니다. 영화가 정부와 국민에게 그 점을 일깨워주길 바랍니다.”
장재진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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