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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길 위의 이야기] 동그라미 그리려다

입력
2015.06.05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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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 무엇보다 동그라미 그리기가 쉽지 않다. 한번은 동그라미를 그려 보려다가 진땀을 뺀 적도 있다. 동그라미만 똑바로 그려도 내가 가진 많은 결함 따위가 치유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지만, 실패였다. 그 이후로 동그라미가 족쇄처럼 돼버렸다. 동그라미도 못 그리는 주제에 뭘 할 수 있을까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스케치북을 하나 샀다. 연필을 쥐고 뭐라도 그려대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음악을 틀어놓고 손 가는 대로 선만 죽죽 그어댔다. 그랬더니, 이상하게 그 선들이 살아 꿈틀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몸에서 이상한 활기 같은 게 느껴졌다. 직선도 곡선도 아닌 마구잡이 선들이 모여 저 나름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나무 같기도, 코끼리 같기도, 집 같기도 했다. 반대로 정물 스케치 같은 건 여지없이 실패. 화분을 그리면 곰 같았고, 탁자를 그리면 소달구지 같았다. 다시, 동그라미를 그려봤다. 울퉁불퉁 참외의 실루엣이었다. 상심하기 싫어 그걸 그냥 참외라 믿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참외라 생각하고 뭘 그려보았다.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제대로 된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머리통을 오랫동안 꽉 옥죄고 있던 동그라미 하나가 해제되는 기분이었다. 동그라미든 참외든, 결국 둥근 건 마찬가지. 그 사실이 왠지 새롭고 통쾌했다. 나를 막고 있는 건 나였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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