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에볼라 바이러스의 공포가 창궐하던 지난해 어느 여름날. 아이들을 데리고 세종시에서 대전으로 나가는 버스를 탔는데, 뒷자리에 앉아 있던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대전에서 에볼라 환자가 발생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기사에서 봤다며 버스가 떠나가도록 공포를 호소하는 이 학생들에 대해 지금은 호들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 당시엔 나 역시 너무 놀라 무릎에 앉혔던 어린 딸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드디어 뚫렸구나. 나는 왜 몰랐을까’ 자책하며 동시에 뉴스 검색.
기사가 알려주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에볼라 바이러스의 주요 발생지인 아프리카 국가의 연구원과 유학생들이 대덕연구단지에 상당수 있다, 그래서 대전과 충남 보건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그게 전부였다. ‘비상’에서 물씬 풍기는 무성의한 과장의 기미는 보통의 독자들로서는 간파하기 어려운 것일 터. 그렇게 핵심 정보들이 누락된 ‘에볼라-아프리카-대덕연구단지-비상’의 연결 고리만으로 ‘괴담’은 간단히 생산되고, 유포됐다. 어떤 사람들은 기사를 이렇게 독해하는구나, 새삼스런 충격 속에 깨닫고는, 영혼 없이 종종 쓰는 ‘비상’ ‘충격’ 같은 단어들은 앞으로, 특히 재난상황에서는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공포는, 주류와 비주류를 가릴 것 없이, 선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 언론의 주력상품이어서 그 경쟁에서 홀로 물러나 있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2009년 신종플루 사태 때 나 역시 공포상품을 열심히 팔았던 전력이 있다. 그 많은 전문가들의 조언을 기사로 쓰고서도 건강한 사람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심한 감기라는 보건 당국의 설명을 거짓말 내지는 변명으로 받아들였다. 지난해 걸린 줄도 모른 채 끙끙 앓고 지나간 독한 감기가 신종플루였다는 것은 두 아이에게 바이러스를 고스란히 옮겨주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대체로 그렇듯이, 전문가들이 옳았던 것이다. 괴기스런 명명으로 공포의 이미지를 배가했던 신종플루는 이제 그 이름도 희미해져 매년 철이 되면 한두 차례씩 유행하는 A형독감일 뿐이다.
현재 해외출장 중인 나는 수시로 접속해 보는 한국의 언론기사와, 아이들의 학교와 유치원에서 보내오는 각종 행사 취소 문자 메시지에, 부끄럽지만, 그 누구보다도 심한 메르스 공포를 겪고 있다. 같은 반 엄마들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는 ‘옆 자치구의 대형병원에 확진 환자가 다섯 명 입원했다더라’, ‘친구가 근무하는 병원 정문에 ○○병원 등이 포함된 거점병원 명단이 붙었다. 그 병원에는 절대로 가지 말아라’ 등 온갖 ‘정보’들이 수시로 올라오고, 그때마다 나는 아이들의 안부를 확인하느라 괜한 국제전화를 걸어대고 있다. 바셀린을 콧속에 바를 것이냐, 말 것이냐 논란도 엄마들 사이에 한 차례 있었다. ‘바셀린을 사? 말어?’ 나 역시 잠시 흔들렸다.
괴담은 우리들 두려운 마음의 표현이다. 정확한 정보에 대한 갈구의 소산이다. 사람들은 사악해서 ‘괴담’을 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량해서 그것을 퍼뜨린다. 미지의 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친구와 이웃들에게 딴에는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그 마음을, 그 갈구를 읽지 못하니, 괴담 유포자 엄중 처벌 같은 헛소리가 나온다. 괴담을 막고 싶으면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하면 된다. 역시 괴담유포자 처벌을 공언했던 신종플루 때는 기껏해야 일대일 문자메시지의 시대였다. 지금은 카카오톡과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시대. 괴담의 전파 속도가 이미 LTE급이다.
우리 사회의 정보 유통구조에서 괴담은 제1단계의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먼저 괴담이 한 차례 돌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돼야 정부가 해명에 나서는 식이다. 그 과정에 이르러서야 믿을 만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이 통상의 구조니, 괴담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매우 효율적이기까지 하다. 선제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는 정부에 괴담은 숙명이다. 감추는 것은 무엇이든, 그렇게 괴담이 된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