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아르코 미술관은 ‘역병의 해 일지’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겁고 후덥한 공기가 몸을 감싸는듯한 이 전시의 제목은 흑사병이 창궐하던 영국의 1665년 기록을 바탕으로 한 대니얼 디포의 소설 ‘역병의 해 일지’(A Journal of the Plague Year)를 인용한 것이다. 인종과 종교에 대한 편견을 비웃은 대가로 투옥되기도 했던 작가는 우리에게 이름보다는 ‘로빈슨 크루소’라는 소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전시 ‘역병의 해 일지’는 2013년 홍콩의 미술기관인 파라사이트에서 처음 열렸는데, 당시의 원제는 ‘역병의 해 일지, 공포, 유령, 반란, 사스, 레슬리(장국영), 그리고 홍콩 이야기’였다. 2003년 홍콩 전역에 퍼졌던 사스(SARS), 같은 해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전해진 배우 장국영의 비극적인 죽음과 홍콩이 겪고 있던 사회 경제적인 불안, 심리적인 상태를 엮어가며 전염병을 빌어 집단적인 공포, 홍콩 내부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맥락, 아시아의 국가주의적 긴장 등의 문제를 돌아보고 성찰하려 했다.
전시의 출발점은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간 1894년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흑사병의 근원균이 발견되었던 시점이다. 전근대적 질병의 대명사인 흑사병 근원균의 발견은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더럽고 미개한 곳이라는 편견을 키우는데 일조하며 더 문명화가 필요한 대상, 병리적으로 위생처리가 요구되는 홍콩의 서구화, 근대화라는 과제와 맞닿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콩에서 오랫동안 기자로 일한 피노누알라 맥휴는 전시되었던 인터뷰 영상에서 디포의 소설 ‘역병의 해 일지’가 2003년 홍콩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에 놀라워했다. 식초에 적신 필터로 호흡기를 통해 침입하는 세균을 막으려 한 주술에 가까운 대응책, 괴담, 결코 감염자 수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 정부의 태도 등은 중동호흡기증후군이라는 메르스에 대한 감염 공포를 둘러싼 현재 한국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최고의 예방책 또한 놀랍게도 홍콩의 사스 때 그랬듯이 마스크를 쓰거나 열심히 손을 닦는 것뿐이다.
과거 흑사병의 시대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여전히 진위를 알기는 어려운 정보와 소식들이 SNS를 통해 더욱 빠르게 공유된다는 것, 정부의 부적절한 조치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인 재기 넘치는 비난과 패러디물이다. 보건복지부가 방역 초기에 ‘낙타와 밀접한 접촉 금지’ ‘멸균되지 않은 낙타유와 낙타고기 금지’를 주된 메르스 예방법으로 홍보한 것은 한동안 놀림거리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전시에는 치사율 90%라는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소식이 흉흉하게 떠돌았다. 그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주의를 마지막으로 1년 가까이 업데이트 되지 않았던 질병관리본부의 공식 트위터는 호된 비난을 받았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함께 묻혀지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미군의 탄저균 반입과 실험,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의 청문회 등이 그렇다.
한편 부산이 보유한 유일한 낙타인 금봉이(27)는 억울한 처지란다. 금봉이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한평생을 이곳에서 지낸 ‘한국형 낙타’이며 메르스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계속 실외 방사장에서 지내도록 할 방침이라는데 여기저기서 애꿎은 낙타들만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질적인 질병과 익숙하지 않은 문화를 대면할 때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실체 없는 막연한 불안,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격도 국가와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양상을 띤다. 올해 메르스와 함께 쓰여질 역병의 일지는 더 큰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속히 마무리 되길 바라지만 역병을 둘러싼 대처의 패턴은 길고 집요하게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역병은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낸다.
이정민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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