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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길 위의 이야기] 그 남자의 여행가방

입력
2015.06.0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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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여행 다닐 때가 아니더라도, 트렁크 끌고 다니는 걸 즐기곤 한다. 바퀴 달린 커다란 통을 이리저리 끌고 다닐 때의 그 우직하고 고단해 보이는 느낌을 즐기는 건지 모른다. 전생에 짐수레 따위를 끌고 다니던 소나 말이었던 걸까. 아무튼, 트렁크를 끌고 다니면 홀연 이곳이 짐을 풀어놓아서는 안 될, 정착이 불가능한 곳일 거라 여겨져 외려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공연히 빈 트렁크를 끌고 동네 인근을 왔다 갔다 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 혼자 상상하곤 했다. 가령 이런 스토리. 어느 한적한 저녁, 매일 일정한 시간에 트렁크를 끌고 똑같은 골목을 배회하는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3층 정도 창문에서 매번 바라보는 여자가 있다. 여자는 남자의 모습을 훔쳐보며 혼자 상상한다. 추레하고, 어딘지 넋이 나가 보이는 남자는 집이 없을 것이다. 늘 어두운 표정에 수상쩍은 인상이나, 그 수상쩍음이 오히려 매력이다. 험상궂기도, 슬퍼 보이기도 한다, 낡은 바퀴소리는 유난히 시끄럽고, 그의 등장을 알리는 반복적인 테마 음 같다. 트렁크엔 과연 뭐가 들었을까… 뭐 이런 이야기.

트렁크를 끌고 거리로 나간다. 공간은 그대로지만, 마음은 늘 여행 중. 이게 누군가 은밀히 품은 호기심의 판도라 상자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래서 바라보는 당신에게 흥미로운 사건이 된다면, 나 역시 좋을 일 일거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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