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부(주심 조희대 대법관)은 한국전쟁 당시 좌우 이념대립 속에 강화 지역에서 활동한 ‘민간인 특공대’에게 집단 학살당한 피해자 유족인 전모씨 등 1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3일 밝혔다. 이에 따라 전씨 등은 16억8,000만원 상당을 배상 받게 됐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강화 지역에 집결해 있던 경찰은 북한 인민군에 밀려 인천 소재 경찰국으로 후퇴했다. 치안 공백을 틈 타 인민군 일부 병력은 강화군 길상면에 짧은 기간 주둔하면서 지방토착 좌익세력과 인민위원회, 자위대 등 예하조직을 구성해 활동했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긴급명령 9호인 비상시 향토방위령을 제정했다. 이 조치로 강화지역에도 지역별 자위대, 치안대가 조직됐다. 이들은 곧바로 인민군 부역 혐의자 수백명을 고문해 살해하고 살아남은 혐의자는 경찰에 신병을 넘겼다.
같은 해 11월 26일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자 국군과 경찰은 다시 철수했지만 함께 인천으로 이동한 일부 피난민들은 강화해병특공대 등을 조직했다. 강화해병특공대는 이후 강화 지역으로 침투해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민간인들을 구금ㆍ고문하고 난정리 돌부리해안, 상룡리 뒷산, 인사리 갯골 등지로 끌고가 살해했다.
원심은 ▲특공대가 1ㆍ4후퇴 이후에는 강화도로 들어가 치안을 유지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실질적인 군ㆍ경의 기능을 수행한 사실 ▲1951년 해군본부가 의용청년군에 탄약의 공급을 실시한 것이 해군본부 작전명 갑 제25호에서 드러난 사실 ▲특공대원 1,000여명이 1951년 중순 경 해군 30~40명과 함께 해군함정을 타고 황해도로 넘어가 식량을 확보하고 포로를 구출해온 사실 ▲특공대원들이 이후 육군 을지병단으로 편입된 사실 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원심 재판부는 “이 사건 특공대의 전신인 치안대 또는 대한청년단 등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 또는 비상시 향토방위령 등 당시 시행되던 법령에 따라 조직돼 순수한 사설단체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이 사건 특공대는 그 전신인 치안대 등과 수뇌부가 거의 동일하고, 국가의 비상사태에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한다는 공통된 목표 아래 부역혐의자 색출 및 향토방위라는 동일한 임무를 수행했다”며 “국가로부터 지시를 받거나 무기를 공급받아 강화도 일대의 치안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단ㆍ조직적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해 국가의 배상책임이 성립한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판단도 같았다. 대법원은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사건 희생자들이 한국군과 미군의 통제 아래에 있던 강화 주둔 유격대에 의해 부역혐의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됐다는 내용의 진실규명 결정을 했으며, 이 사건 희생자들의 유족인 원고들이 진실규명 결정일로부터 3년이 경과하기 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국가가 (상고이유로)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는 권리남용에 해당해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김청환기자 ch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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