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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일본 때문에 서두르지 말자

입력
2015.06.0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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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중국 외교학원의 이사장과 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친야칭(秦亞靑)의 글을 한편 읽은 적이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국제정치학자답게 중국 전통철학과 서구의 사상들을 비교하며 중국 외교의 특징을 깊이 있게 적은 글이었다.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시류와 변화에 관한 부분이었다. 커다란 시류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준비하다 때가오면 단호한 정책적 변화를 일으켜 흐름에 따라 국력을 증대해 나가는 것이었다.

중국이 성공했던 대표적인 예는 1972년의 미중 데탕트다. 데탕트의 연장선에서 72년 중국과 수교한 일본과 더불어 구소련에 대항하는 미중일의 밀월시대는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나가는 1980년대 말까지 약 20년 가까이 지속된다.

그 사이 1978년에는 덩샤오핑이 마침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며 또 다른 변화를 일으킨다. 국제정세의 흐름을 지켜보던 덩은 가까운 시기에 강대국 간의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경제발전에 중국의 국력을 집중한다. 당시 일본은 국방을 미국에 맡기고 경제에 매진한지 약 30년이 지난 시기였다. 덩은 시류를 잘못 보고 문을 닫고 있었던 청조 말의 근대화시기에 더하여 중국이 1960, 70년대의 고립주의와 문화대혁명으로 서구와 일본에 더욱 뒤쳐졌음을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헌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냉전 말기의 중국은 또 다른 의미를 보여준다. 당시 중국의 국내외 정세는 급격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덩은 1992년 초 ‘남순강화’를 통한 깊은 숙고 끝에 결국 기존의 개혁개방정책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리고 낮은 자세로 힘을 기르는 ‘도광양회’ 외교 전략을 발표한다. 덩은 시류가 아무리 격동을 해도 지금은 흔들림 없이 나아갈 때라고 판단했다. 즉, 시류의 흐름은 면밀히 관찰하되 변화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최근 한반도 주변의 움직임에 작은 변화들이 일고 있다. 미중 사이에서 동시에 구애를 받는다고 즐거워하던 한국이었는데 어느새 미국은 일본의 손을 굳게 잡고 한국의 역사문제 제기에 피로감을 표현한다. 중국은 사드 문제로 한국에 압력을 가하면서, 일본과는 두 번 정상끼리 만났다. 최근 주북한 중국대사로 부임한 리진쥔은 북중관계를 ‘순치상의(脣齒相依)’로 표현하며 관계 개선의 기미까지 보이고 있다. 한국 외교가 주변부로 밀려나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이달에 예정되어있는 박 대통령의 방미도 지난 아베 총리의 방미 성과와 비교되며 우리 나름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야 하는 부담에 쌓여있다.

하지만 일본 때문에 서두르지는 말자. 일본이 그간 미국과의 관계에서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은 과감한 정책 변화가 가능한 시기라는 정확한 시류 판단 때문이었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아베를 중심으로 재무장의 ‘정상국가’로 나아가려는 일본 우익정치세력 사이의 전략적 이익이 공유되는 시기였다. 지역 내에서 사실상 중국을 견제하는 미일동맹과는 다르게 한미동맹을 중국이 아닌 북한의 위협에 초점을 두려는 한국으로서는 당연히 어려운 시기일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은 일본처럼 중국과 주고받을 것이 많은 나라도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대중정책은 근본적으로 ‘헤징’이다. 부상하는 중국과의 협력이 필요하지만, 중국이 향후 미국이 구축해놓은 질서에 도전하고 수정하려는 모습을 보일까 봐 아시아 동맹국들과 안보협력을 강화해왔다. 미국의 견제는 계속되겠지만 일정 수준의 견제기제가 구축된다면 미국은 다시 협력에 집중할 것이다. 협력의 구도로 바뀌어 간다면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역할은 점차 커질 것이다. 중일과 북미관계의 근본적인 불신을 이해한다면 동북아에서 미중 사이의 전략적 가교 역할은 한국만이 가능하다. 지금은 시류의 끝자락에 휘말려 변화를 서두르기보다 유리한 때를 기다리며 우리 외교 특색의 정책과 입장을 견지하고 가다듬으며 준비 할 시기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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