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치 않았다. ‘Nkosi sikelel' iAfrika(신이여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 코사어로 시작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국가는 줄루어-소토어-아프리칸스어-영어 순으로 이어진다. 음정 박자보다는 생소한 단어가 문제였다. ‘인다바(INDABA)2015’ 참가자들은 결국 두세 음절을 넘기지 못하고 혀 꼬인 웃음으로 노래를 마무리 지었다. 인다바는 매년 남아공에서 열리는 아프리카 최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관광박람회다. 더반 시티투어에 나선 각국 언론인을 상대로 남아공의 다양성을 강조하려 한 주최측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한국의 12배가 넘는 넓은 땅덩어리에 흑인 백인 컬러드(혼혈 유색인) 인도계 등 인종적으로도 다양한 색깔을 보유한 곳이 남아공이다. 며칠간의 여행으로 전달할 수 있는 남아공의 모습은 수천 수 만개의 퍼즐 중 몇 조각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 전해들은 것까지 그림에 넣었으니 퍼즐이 조금 어긋날 수도 있겠다.
#1. 요하네스버그(남아공에선 줄여서 ‘조벅’이라고 부른다) 공항에서 3번이나 환승하는 일정이었다. 갈아탈 비행편을 확인하기 위해 전광판 앞에 얼쩡거리면 어김없이 2인조 남성 도우미(?)가 달라붙는다. 됐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This is my job(내 직업이야)”이라며 당당하다. ‘그래 1달러 정도 쓰지 뭐’하며 따라 간 게 잘못이었다. 10란드를 내밀었더니 자신의 주머니에서 200란드 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그만큼 달란다. “200란드?”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2만원 가까운 금액이다. 물건을 살 때마다 듣게 되는 ‘리즈너블(합리적인)’한 가격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큰 목소리에 주위의 이목이 쏠렸고, 도우미는 10란드만 받고 잽싸게 사라졌다.
케이프타운의 훗베이 난전에서는 멀끔하게 차려 입은 남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점심 사먹게 100란드만 달란다. ‘원 달러’라고 생각했던 구걸의 국제기준(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다)을 훨씬 웃도는 금액에 놀라고 당당함에 기가 막힌다. 낑낑대며 짐을 들어준 호텔 직원에게 잔돈이 없어 팁도 못 주고 왔는데…. 대꾸도 않자 쿨하게 돌아선다. 손해본거 없는데 찜찜하다.
#2. “오 마이 갓!” 비명에 가까운 탄성과 동시에 ‘쿵!’ 소리가 비좁은 가게 바깥까지 들렸다. 더반 시청 인근 모자를 파는 노점에서 점원 아가씨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부탁한 게 화근이었다. 함께 있던 덩치 큰 여성 둘이 동시에 카메라 앞으로 돌진하면서 점원 아가씨가 밀려 넘어진 것이다. 다행히 앳된 모습의 점원은 바로 일어서서 화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DURBAN’ 띠를 두른, 3개 90란드(한국 돈 9,000원도 안 된다)하는 페도라를 기어이 10란드 깎고야 만 야박함이 미안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꼬리표가 달갑지 않긴 했지만 말이다.
더반 사람들은 유난히 사진 찍히기를 즐긴다. 흑인 거주지역 타운십(Township)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해코지 당할까 차창만 내리고 사진을 찍는데도(사실 인간적인 도리에서 한참 벗어나는 짓이었다) 활짝 웃으며 경쟁적으로 포즈를 취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질병 가난 분쟁 살인 강도 등등 부정적 단어로만 가득 찬 흑인과 아프리카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국제회의장(ICC) 앞에서 만난 청년들은 더 적극적이었다. 옛 교도소 터를 기리기 위해 남겨둔 담벼락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지나가던 젊은이들이 거리공연 하듯 비보이 대형으로 늘어서서 포즈를 취한다. 카메라를 내리고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도 전에 유유히 제 갈 길로 사라진다. 얘들 뭐지? 그러고 보니 사진 찍히는 데는 적극적이었지만 누구 하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하기는커녕 어떻게 찍혔는지 보자고 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3. 인다바 통역지원을 나온 이진명씨가 차 안에서 리모컨을 누르자 철제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남아공에서 13년째 살고 있는 그의 2층 집은 갤러리처럼 단정했다. 방만 9칸인 저택에 테니스장과 수영장까지 갖췄다. 커피한잔 하자며 들어간 부엌 크기만도 웬만한 원룸보다 넓어 보였다. “서울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되요” 어느 지역 어떤 규모의 아파트를 상정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더반 웨스트빌은 대표적인 백인 거주지다. 나무에 가려 도로에서는 규모를 파악하기조차 힘든 집들이 즐비하다. 그녀의 부모님도 식물원에 온 것 같다고 했단다. 천연잔디 축구장이 수두룩하고, 공공 야외수영장도 인근에 있다. 가족들의 주말 일과는 아이들과 클럽 스포츠 활동을 함께하는 것이다. 이곳이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흑인밀집 거주지 타운십은 완전히 딴판이다. 뙤약볕 열기가 그대로 전해질 양철지붕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나마 곳곳에 공동화장실이 있는 걸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타운십이 백인거주지와 동떨어져 있는 건 아니다. 부자 동네에 값싸게 노동력을 제공하려면 인접해 있어야 한다. 대중교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입이나 고용에 흑인할당제를 실시해 격차를 줄여가는 중인데, 일부에서는 소수인 백인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불만도 있단다. 사회경제적 여건을 무시한 ‘소수’의 사전적 의미가 무색하다.
#4. “남아공 위험하지 않아? 호텔 밖으로 맘대로 나가지도 못한다던데” 부러움 반, 걱정 반 섞인 질문을 여럿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부는 맞고, 많은 부분은 틀리다.
더반에서 시장 구경에 나섰을 때 현지인 가이드는 경비가 그런대로 갖춰진 인디언마켓 한곳만 안내했다. 삶의 활력이 꿈틀대는, 바로 앞 빅토리아 시장은 차창을 통해 건성으로 훑을 수 밖에 없었다. 치안 상황에 대해 물었다. “관광객 티를 내지 않는다면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하나마나 한 대답이 돌아왔다. 외모와 입성부터 튀는 여행객에겐 무리한 연기 부탁이다.
정부차원의 개선책이 있냐는 질문에 관광청 관계자의 답변도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뉴욕이나 시드니 등 세계 대도시 어디에도 비슷한 유형의 범죄가 있다. 요하네스버그나 케이프타운이라고 특별할 게 없다. 단지 이곳이 아프리카라는 이유로 더 부각되고 있어 안타깝다” 대외 인식개선에 더욱 힘쓰겠다는 말이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남아공에 고스란히 덧씌워지는 게 억울하다는 투다. 그럴 만도 하다. ‘흙먼지 풀풀 날리고 지저분한 아프리카’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잊어야 한다. 도로는 잘 정비돼 있고, 거리도 깨끗하다.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잘 갖췄다. 겉모습은 세계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남달리 모험가적 기질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남아공이라고 위험할 건 없다. 더구나 단체여행이라면 위험한 시각에 위험한 지역에 갈 기회조차 없을 게 뻔하다. 해가 떨어지면 밤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고 케이프타운에서도 가장 안전하다는 워터프런트의 고급식당과 백화점도 오후 9시면 모두 문을 닫는다. 한국식 ‘밤 문화’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안전할 수 밖에.
더반/케이프타운/요하네스버그=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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