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60~70%가 여성… 국내 싱글몰트 인기 이끌어
유학 중 바 문화 경험한 전문직, 스트레스 해소 위해 많이 찾아
지난달 29일 밤 서울 청담동. 이른바 ‘불금’을 맞아 요즘 유행한다는 ‘위스키&칵테일 바’ 네 군데(앨리스, 스틸, 노마드, XII)를 돌아봤다. 증명해야 하는 가설이 있어서다. 값비싼 독주와 이 독주들을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을 골라 마실 수 있는 청담동 일대의 고급한 바 문화를 여자들이 이끌고 있다는 첩보 입수. 때마침 발간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음주행태 보고서는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집단으로 보통의 남성이 아닌 부유한 고학력 여성을 꼽았다. 정말로 청담동 일대의 바에는 여성 고객이 더 많고, 이들은 부유한 고학력 여성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머리 속에서 조신하게 공부하거나 일하고 있으리라 예측되는 이 엘리트 여성들이 바로 몰려드는 이유는 뭘까?
여성이 새로운 술 문화를 이끈다
둘러본 바들은 모두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성 고객이 절반 이상, 많은 곳은 70% 이상이었다. 남성과 함께 온 여성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여자친구들끼리 함께 온 손님들이었다. ‘불금’의 특성일 수도 있고, 바의 특성에 따라 남성 고객이 더 많은 곳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평일에도 여성고객들이 상당하다는 게 바텐더들의 일관된 증언. 앨리스의 이진용 바텐더는 “평일에도 고객의 60~70%가 여성”이라며 “해외유학을 다녀온 전문직 여성들이 외국에서 경험했던 바 문화를 찾아 많이들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스틸의 임재진 대표도 “최근 1,2년간의 경험으로 보건대, 여성 고객 중에 교수나 의사, 회계사 같은 전문직들이 꽤 많다”고 말했다.
지난달 12일 발간된 OECD의 보고서는 음주의 심각한 폐해를 저지하기 위해 17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다. 성과 계층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음주 위험군을 분별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음주 위험군에 속하는 저학력ㆍ저소득층 남성들과 비슷한 비중으로 부유한 엘리트 여성들이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학력 여성들이 들어가는 전문직종 대부분이 금융, 법률 등 ‘최고급 서비스 산업’이고, 이들 직종은 업무 스트레스가 높아 음주문화가 터프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OECD의 분석이다.
부유한 고학력 여성들은 술을, 특히 스피릿(spirit)이라 불리는 알코올 도수 40도 이상의 독주를 위험물질이 아닌 음식과 문화로 즐긴다. 국민 위스키라 불리는 잭다니엘스의 제조사 브라운포맨 한국지사가 최근 20~39세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스피릿의 여성 음용률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조사에 따르면, 전체 주종 중 양주를 주로 먹는 비율이 여성 17.1%로 남성 13.8%를 웃돌았다. 최근 양주를 먹는 빈도가 증가했다는 응답도 여성이 23.8%로 남성의 21.3%보다 높았다. 술을 10회 마시면 3회 이상 양주를 마신다는 비율도 여성이 41.4%로 남성 42.3%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주로 먹는 양주의 주종으로는 위스키가 압도적이어서 51.4%나 됐고, 보드카가 26.6%, 테킬라가 5.6%로 그 뒤를 이었다. 싱글몰트를 위시한 위스키의 붐을 일으킨 주역이 여성임을 추측할 수 있는 통계다.
술의 맛과 향, 문화를 즐긴다
이 조사에서 양주 등 수입주류를 예전보다 더 많이 마시게 됐다고 응답한 사람은 22.2%였다. 그 이유로 남녀 공히 ‘맛있다’를 꼽았다. 하지만 맛 때문에 양주를 마신다는 여성(30.2%)이 남성(22.1%)보다 훨씬 많았다. ‘숙취가 덜하다’ ‘동료가 선호한다’ ‘접할 기회가 생겼다’ 등을 이유로 꼽은 응답자도 모두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다. 하지만 ‘경제력이 생겼다’를 이유로 꼽은 응답자는 남성이 11.8%로 여성 4.7%보다 훨씬 많았다. 양주가 남자에게는 ‘부의 상징’, 여자에게는 ‘문화의 상징’인 셈이다.
스틸 바에서 만난 연세대 의과학대학원생 김민지(가명ㆍ25)씨는 “친한 친구들과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풀기에 바만한 곳이 없다”며 “많을 때는 주 3~4회, 못 와도 주 1~2회는 바에 온다”고 말했다. “대학생 때는 인간관계를 넓히기 위해 폭탄주를 과음하는 게 보통이었죠. 하지만 전혀 즐거운 문화가 아니었어요. 요즘은 소수의 친구들과 싱글몰트 위스키나 칵테일 잘 하는 바를 찾아다니며 술마다 갖고 있는 맛과 향을 음미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어떤 조합에서 최고의 맛과 향이 나오는지,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를 바텐더에게 배우면서 친구들과 조용히 대화도 나눌 수 있거든요. 요즘은 커피숍이든 술집이든 다 시끄럽잖아요.”
맥캘란, 글렌피딕, 아일라 등 싱글몰트의 인기는 커피믹스가 전부인 줄 알았던 한국사회에 스타벅스 커피가 등장한 것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다. 위스키는 크게 보리로 만든 몰트 위스키와 옥수수, 호밀 등 곡물로 만든 그레인 위스키, 이 둘을 섞은 블렌디드 위스키로 나뉘는데, 몰트 위스키 중 한 증류소에서 나온 술만 담은 것이 싱글몰트다. 이게 바로 블렌디드 위스키밖에 몰랐던 한국인들의 입맛을 놀라게 한 술. 이것저것 섞지 않아 다소 거칠지만 깊고 강한, 맛과 향의 원형을 일깨우는 술이다. 싱글몰트가 촉발한 최근의 위스키 붐은 과거 공부하며 먹는 술로 맹위를 떨친 와인의 대중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고급 위스키와 이에 기반한 퀄리티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바는 2007년 이전에는 단 한 곳에 불과했다. 2010년에도 10곳 정도였다. 하지만 현재는 100여곳에 이를 정도로 급증했다. 우리나라에 위스키 바 문화를 본격적으로 보급한 재키 유 위스키라이브 대표는 “스코틀랜드 장인들이 역사적인 증류소에서 장인정신을 갖고 만드는 몰트위스키는 와인처럼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는 술”이라며 “스토리와 퀄리티가 있고, 등급체계와 그에 따른 음용 예법이 있어 문화지향적인 고소득ㆍ고학력 여성들의 기호에 맞는다”고 분석했다. 우산 꽂은 섹스 온 더 비치나 피나콜라다가 칵테일의 전부인 줄 알고 있다가 올드패션드, 새즈락, 위스키 사우어, 라모스 진 피즈 같은 세계사와 문학사의 자장 아래 있는 하이엔드 칵테일을 접하게 되면서 칵테일을 공부하며 먹는 술로 받아 들이게 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알코올을 마신다기보다는 멋과 문화를 마시는 것이다.
위스키&칵테일 바의 인기는 강압적 회식문화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다. 싱글몰트는 한 병을 통째로 시켜 다같이 돌려 마시기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술을 골라 잔으로 마신다. 강요당할 필요 없이 자신의 기호와 속도에 따라 마실 수 있는, 개성이 강조되는 술이다. 세 명이 가면 세 가지 각기 다른 싱글몰트를 골라 원하는 만큼만 먹을 수 있으니, 잘 알지 못하면 즐길 수 없는 술이기도 하다.
바의 문화는 여느 술집과 달리 여성으로 하여금 매우 존중 받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재키 유 대표는 “사회적으로 여성의 지위와 역할 상당히 올라왔는데도 회식 문화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아 툭하면 ‘한 잔 따라 보게’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몰트나 칵테일은 남성 주도의 회식 문화에 질식할 것 같았던 고학력 여성들이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주체적으로 즐기는 술로 제격”이라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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