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사냥’으로 유명한 배창호(62)영화감독의 1일 철로 추락 사고 소식에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배 감독이 승강장에서 스스로 떨어져 부상을 입은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경찰에 따르면 배 감독은 이날 오전 5시 58분 지하철 분당선 한티역 왕십리 방면 승강장에서 스스로 추락하는 모습이 CCTV(폐쇄회로)에 찍혔다. 배 감독은 얼굴과 허리 등에 타박상 등을 입고 사고 직후 인근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경찰은 배 감독의 투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조사를 하고 있다.
배 감독은 최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종교 관련 영화 작업 준비를 하며 수개월간 수면 장애도 겪었다. 사고 당일 병문안을 다녀온 이장호 감독은 “배 감독 가족들 얘기를 들어보니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빠져 고질적인 불면증에 시달린데다 음식도 너무 먹지 않아 체력이 약해진 상태였다더라”고 안타까워했다. 입원 중인 배 감독은 이번 사고로 정신적인 충격이 커 원활한 의사 소통이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감독은 “최근에 봤을 때도 살이 쪽 빠져 있었다”고 들려줬다. 두 사람은 30년 넘게 각별한 친분을 이어온 영화 지기다. 배 감독은 1980년 이 감독이 연출한 ‘별들의 고향’의 조감독으로 충무로에 입성했다.
배 감독은 영화 제작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지만 1994년 자신의 이름을 단 배창호프로덕션이란 독립제작사를 세운 뒤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등 대중적인 영화가 아닌 ‘정’(2000) ‘길’(2006) ‘여행’(2010) 등 독립영화 제작에 전념해 온 탓이다.
한국 영화 시장이 최근 3년 연속 관객 1억 명을 돌파하며 활황을 맞은 듯 하지만 한국영화의 성공을 일궈낸 제작진 등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는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기업 계열 배급사와 복합상영관 중심의 독과점 구조로 독립영화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1980년대 충무로에서 황금기를 구가했던 배 감독도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배 감독의 재기를 바라는 영화 관객들이 적지않다. 그가 스크린에 펼쳐왔던 삶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철학 덕분이다. 특히 방황하는 청년들의 혼란을 탁월하게 포착했다. ‘고래사냥’이 대표적인 예다. 배 감독은 1980년대 한국 영화 리얼리즘을 이끌었던 창작자로도 꼽힌다.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는 전형적인 러브스토리에서 벗어나 연인 사이 소소한 감정선을 끌고 가면서도 높은 집중력을 보여줬다. 배 감독의 사고 소식을 접한 한 네티즌(@2shyb***)은 ‘영원한 영화청년. 꿈꾸는 몽상가이자 현실을 직관하는 리얼리스트. 이명세 등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친 배창호 감독. 부디 안정을 찾아 차기작으로 돌아와주길’이란 글을 트위터에 올려 배 감독의 부활을 바랐다.
영화 관객뿐이 아니다. 배 감독의 페르소나라 불리는 배우 안성기도 병실을 찾아 배 감독을 위로했다. 안성기는 배 감독의 ‘고래사냥’과 ‘기쁜 우리 젊은 날’에 출연했다. 안성기 외에 배우 박중훈도 배 감독을 찾아 배 감독의 회복을 바랐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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