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때
유엔군 산하 주일미군 '행동의 자유'
한미일 3각 안보관계 근간으로
日, 밀약 폐기 주장했지만 美 수용 안 해
2010년 전격 공개… 무효화 노려
2010년 3월 일본 외무성은 과거 미국 정부와 체결한 이른바 ‘한국 밀약(密約)’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1960년 미일안보조약이 개정된 날 미국과 일본이 별도로 비밀리에 합의한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전투작전행동에 관한 의사록’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郞) 당시 일본 외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한 유엔군에 대한 공격으로 인한 긴급사태가 발생할 시에는 예외적 조치로서 … 유엔군사령부 산하의 주일미군이 즉각 … 일본의 시설 및 구역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며, 이를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의 허가를 받아 밝힌다.” 요컨대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은 일본 정부와 협의하지 않은 채 ‘즉각’ 일본 내의 군사기지를 활용해 한국에 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밀약’은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을 한미연합군의 증원전력으로서 신속하게 투입하기 위한 법적 장치인 만큼 우리 안보에도 매우 중요하지만, 일본은 왜 주권의 제약을 감수하며 주일미군에게 이러한 ‘행동의 자유’를 부여한 것일까.
‘한국 밀약’을 둘러싼 미일동맹, 나아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한일 안보관계의 동학과 역사적 기원을 살펴본다.
‘유엔의 권위’와 한미일 3각관계의 형성
앞서 인용한 ‘한국 밀약’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한반도 유사시 일본 정부가 ‘예외적 조치’로서 ‘행동의 자유’를 인정한 군대는 단순한 미군이 아니라 ‘유엔군사령부 산하의 주일미군’이다. 이는 한국 안보와 관련된 미일동맹 체제가 유엔군사령부로 대표되는 ‘유엔의 권위’를 통해 관리, 유지된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한국 안보에 일본의 존재가 부각된 최초의 결정적 계기는 ‘유엔 모자’를 쓴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이었다. 주지하듯이 미국은 유엔 결의(특히 안보리결의 S/1511, S/1588)를 근거로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패전국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주일미군이 유엔군 자격으로 한반도 전선에 우선적으로 투입됐다. 당연히 유엔군에 대한 후방지원 기지로서 일본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8일 일본의 주권 회복을 인정한 대일 강화조약에 이어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은 ‘유엔의 권위’를 매개로 한 미국의 한반도 및 동아시아 군사정책의 결정판이었다. 이 조약은 전문에서 주권국가의 집단적, 개별적 자위권 행사를 명시한 유엔헌장을 인용한 뒤 극동 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고 일본 내 내란 및 소요사태의 진압을 위해 미군의 일본 주둔을 정당화했다(제1조). 이로써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방위의 병참 및 후방지원기지, 출격기지로서 명확히 설정되었다.
같은 날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과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일본 총리는 추가적으로 이른바 ‘애치슨-요시다 교환공문’을 주고 받았다. 이는 강화조약의 발효(일본의 독립) 이후에도 유엔군에 대한 일본의 계속적인 후방지원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이 미 극동군사령관을 겸하고, 더욱이 유엔군의 주력부대가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의 미군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이 교환공문에 적시된 ‘일본이 지원할 유엔군’이란 주일미군을 의미한다.
‘기지 국가’ 일본과 한국 안보
미일안보조약을 통해 미군의 일본 주둔과 일본 내 기지사용권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왜 추가적으로 ‘애치슨-요시다 교환공문’을 맺은 것일까. 미일안보조약 상의 주일미군은 ‘극동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일본에 주둔하는 문자 그대로의 주일미군이지만, ‘교환공문’ 상의 주일미군은 유엔군사령부 산하의 ‘유엔군’이기 때문이다. 유엔군을 지휘하는 미군은 유엔이라는 보다 강력한 정통성을 내세움으로써 일본 내의 기지사용과 일본의 후방지원을 보다 확실히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애치슨-요시다 교환공문’은 1960년 1월 미일안보조약이 개정될 때 기시 총리와 아이젠하워 정부의 크리스찬 허터 국무장관이 서명, 교환한 ‘애치슨-요시다 교환공문 등에 관한 교환공문’을 통해 재확인되었다. 이후 미일 간에 이 교환공문의 변경에 관한 논의가 없었고, 일본 정부 또한 이 교환공문의 효력을 부인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 방위를 위한 유엔군에 대한 일본의 지원 의무는 지금도 유효하다. 요컨대 ‘애치슨-요시다 교환공문’은 ‘유엔의 권위’를 매개로 한 한미일 3각 안보관계의 출발점이자 근간인 셈이다.
다만, 이 교환공문은 어디까지나 미일 간의 조약이었기 때문에 미군 이외의 유엔군사령부 소속 군대가 일본 내 기지를 이용하는 데는 법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 소속 16개국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 제2의 한국전쟁 발발 시에 즉각 단결, 대응한다는 내용의 ‘워싱턴 선언’을 채택하고, 이를 반영해 이듬해 2월19일 미국을 포함한 유엔군사령부 소속국과 일본 간에 별도로 이른바 ‘유엔군지위협정’을 체결했다.
총 25조에 이르는 이 협정과 부속문서인 ‘합의된 공식 의사록’의 내용을 언급할 여유는 없으나, 의사록에는 유엔군에게 기지의 안전과 관련해 범인 체포권을 부여하는 등 일본에는 굴욕적인 규정도 포함돼 있다. 여하간 이 협정에 서명한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스트리아 필리핀 프랑스 이탈리아 등 7개국은 주일미군 기지 가운데 캠프 자마, 요코타 비행장, 요코스카 해군기지, 사세보 해군기지, 가데나 비행장, 후텐마 해병대 항공기지, 화이트 비치 해군기지 등 일본 내 7개 기지를 사실상 무제한으로 사용하는 권리를 갖게 됐다.
미국은 한국전쟁 후에도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의 작전행동의 자유와 이에 대한 일본의 지원의무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유엔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엔군사령부가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법적으로나마 그 기능을 지키는 것이 긴요했다. 한국의 유엔군사령부와 일본의 유엔군후방사령부(UNC Rear)가 실질적 능력과는 무관하게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다.
1969년 ‘한국 조항’은 ‘한국 밀약’ 무력화 시도
다른 한편으로 1951년 미일안보조약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할 요소가 많은 불평등 조약이라는 불만이 일본 내에서 팽배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조약에 의거해 주일미군은 일본 내의 내란이나 소요사태에 개입할 수 있었고, ‘극동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명목으로 일본의 동의 없이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본 내의 ‘불만사항’을 반영해 반란 진압 조항 등을 삭제하고 주일미군의 작전행동에 대한 일본의 발언권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이른바 ‘사전협의제’를 도입한 것이 바로 1960년 개정돼 지금껏 유지되고 있는 새로운 미일안보조약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때도 미국은 한국 방어에 소요되는 유엔군사령부 산하 주일미군의 군사행동만큼은 일본과의 사전협의라는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별도로 미일 양국이 체결한 것이 바로 모두에서 언급한 ‘한국 밀약’이다. 이는 일본과의 사전협의를 명시한 개정된 미일안보조약의 내용과는 상반되므로 그야말로 ‘밀약’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개된 미일안보조약과는 별도로 밀약 형식으로 한반도 유사시에 대한 미군의 군사행동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행동의 자유’를 부여한 것은 일본으로서도 국내정치적으로 커다란 부담이었다. ‘한국 밀약’을 무력화할 기회는 1960년대 후반 오키나와 반환 교섭이 본격화하면서 찾아왔다. 이때 일본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작전행동에 대해서도 개정된 미일안보조약을 적용해 전면적인 사전협의제의 적용을 요구하는 한편, ‘한국 밀약’의 폐기를 주장했다. 하지만 한반도 유사시에 관한 한 무제한적인 군사행동의 자유를 계속적으로 누리길 원했던 미국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본이 거의 ‘일방적으로’ 취한 행동이 바로 유명한 1969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의 ‘한국 조항’ 발언이다. 1969년 11월 미일정상회담 결과 채택된 공동성명 제4조에서 사토는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에 긴요하다”고 밝혀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한국 안보에 대한 일본의 관심을 표명했다. 지금껏 ‘한국 조항’은 일본이 오키나와를 돌려받기 위해 지불한 대가였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뤘지만, 새롭게 공개된 일본외교문서에 따르면 이는 일본측이 ‘한국 밀약’의 폐기에 실패하자 독자적으로 발표한 성명에 가까웠다. 공개되면 더 이상 밀약이 아닌 만큼 성명을 통해 무력화를 도모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013년 일본 외무성이 ‘한국 밀약’을 전격 공개한 것 또한 밀약의 내용을 무효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에서 국가 간 약속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행동에 의해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공개된 조약은 물론이고 밀약 문서에 적혀 있는 권리와 의무가 이행되는 경우는 조약 당사국 간에 신뢰와 공통의 이익이 존재할 때에 한정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가 ‘한국 밀약’을 만들고 또 다른 외할아버지인 사토는 밀약의 무력화를 시도했지만, 보다 중요한 교훈은 한일 간에 신뢰가 존재했다면 미국이 이런 희한한 밀약을 일본에 강요하는 일이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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