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 다양한 필터로 식수 확보
주변에 흔한 모래·진흙·쌀겨 이용
개당 70달러 가격에 큰 효과
선진국도 적정기술 필요
자연 재난 시 라이프스트로 등 개인용 정수기 긴급 구호에 진가
우간다 북부 루이히라 지역에는 세계 빈곤 퇴치를 위해 2000년 유엔이 설정한 새천년개발목표(MDGs)의 달성을 위한 시범마을이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제프리 삭스 교수가 설립한 밀레니엄 프로미스라는 기구가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를 진행, 안전한 식수 확보를 포함한 새천년개발목표 계획을 지난 10년간 추진해왔다. 2014년 봄 루이히라 마을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주민 9,000여명에게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급수시설을 발견했다. 소규모 시설이었지만 설치에 약 50만달러(약 6억원)이라는, 외부 지원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었다. 만약 물 부족을 겪는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에 이런 시설을 설치하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탄자니아에서 진행됐던 식수 확보 프로젝트는 이와 대조적이다. 필자가 소장으로 있는 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는 매사추세츠공대(MIT) 한인 유학생 등으로 구성된 아쿠아팀과 함께 탄자니아 다레살렘 인근 마을에 ‘바이오샌드필터(Bio Sand Filter)’를 수십개 보급했다. ‘저속모래여과기’라고도 불리는 바이오샌드필터는 빈 통에 물이 나오는 파이프를 설치하고 통 속 바닥부터 자갈, 굵은 모래, 고운 모래를 차례로 채워넣은 도구다. 하루에 두 번 강물을 모래 위에 부으면 약 2주 뒤에 미생물 막이 형성되는데 이 막이 물 속 세균을 제거한다. 미생물 막이 마르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물을 부어 주고 오염된 미생물 막을 주기적으로 제거해 주기만 하면 걸러진 물을 마셔도 문제가 없다.
바이오샌드필터의 가장 큰 장점은 현지 SON International이라는 비정부기구(NGO)를 통해서 구입한 가격이 개당 70달러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운송 설치 교육이 모두 포함된 가격으로, 다량 구매 시 가격을 더 낮출 수 있다. 또 현지에서 쉽게 제작할 수도 있다.
필자가 바이오샌드필터를 설치한 후 1년 반이 지난 후에 방문해 사용 중인 바이오샌드필터의 성능을 점검한 결과 음용수로서의 기준을 만족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품을 사용 중인 가정은 설사 등의 수인성 질병으로 고생하는 일이 없어졌다며 매우 높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비교적 적은 비용을 들이고도 개도국의 시급한 식수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적정기술 제품의 대표적인 사례다.
완벽한 급수시설, 완벽하지 않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전세계에서 10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안전한 식수를 마시지 못한다. 아이들만 보면 5명 중 1명(약 4억명) 꼴이다. 또 수인성 질병으로 인해 매년 200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정되며, 매일 3,900명의 어린이가 식수와 기본위생 결핍으로 죽어간다. 이들 대부분은 개발도상국에 거주하고 있다. 개도국에서 안전한 식수를 확보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한 문제이다. 하지만 빈곤이 심각한 개도국에서 선진국과 같은 상수원 급수시설을 보급하겠다는 접근법은 오히려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바이오샌드필터와 같은 적정기술이 절실한 것이다.
개도국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식수 관련 적정기술 제품으로는‘세라믹워터필터’가 있다. 이 제품은 과테말라의 한 화학자가 처음 고안한 뒤 남미, 동남아, 아프리카 등에서 현지 사정에 맞게 변형해 사용되고 있다. 현재까지 전세계에 100만개 이상이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방문한 탄자니아의 아루샤 지역에 위치한 한국 NGO의 현지사무소 담당자의 집에서도 이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
세라믹워터필터는 세라믹 정수기 부분과 여과된 물을 저장하는 플라스틱 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수기 부분은 주위에서 흔히 보는 화분 모양이다. 다른 점은 진흙과 쌀겨 또는 왕겨를 적절한 비율로 혼합해 고온에서 구워, 눈에 보이지 않은 미세한 기공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미세한 기공을 통해서 물은 빠져 나오고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걸러진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에서 유니세프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파손되지 않을 경우 세라믹워터필터의 평균 수명은 4년 정도다. 이 제품은 개도국의 가내 공장에서 제조돼 고용 창출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일부 개도국에서는 비소 또는 불소가 문제가 되는데 이를 제거하는 흡착제와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MIT 수잔 머콧 교수는 세라믹워터필터를 활용해 비소 등을 제거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단점은 떨어뜨릴 경우 파손되고, 여과 속도가 느려 밤에 물을 부어 놓고 아침에 모인 물을 마셔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교적 여유시간이 많은 개도국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격도 15~25달러 정도다. 필자가 얼마 전에 출연한 방송에서 몇 가지 적정기술 제품을 소개했을 때 우리나라 방청객들은 이 제품에 대한 관심이 가장 컸다.
이 밖에 식수를 정수하는 방법으로 태양열로 물을 증발시켜 그 수증기를 다시 응축하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응축된 물은 훌륭한 식수가 된다. 이 장치는 알루미늄 팬과 비닐랩 등으로 비교적 쉽게 제작가능하며, 상용화된 것으로는 워터콘과 솔라볼 등이 있다. 이 제품의 단점으로는 물이 따뜻하므로 식혀 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기 또는 안개 중에 있는 수증기를 응축하는 방법도 있다. 일반적으로 그물망이 사용되는데 MIT의 연구팀이 그물망 재료, 기공 크기 등을 연구한 끝에 최적의 조건을 발견해 남미에 직접 설치했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는 수증기 채집을 위해 ‘와카워터’라는 대형 구조물을 설계하기도 했다.
아열대 기후에 있는 개도국은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고 건기에는 정수할 물 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반면 공해 시설은 많지 않아 이 경우 빗물이 매우 깨끗한 식수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기에 빗물을 충분히 저장해 두었다가 건기에 식수로 사용하는 것도 개도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식수 확보 방안이다.
식수확보, 개도국만의 문제 아냐
식수를 확보하기 위한 적정기술이 개도국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유사시 선진국에서도 이 같은 적정기술이 큰 힘을 발휘한다. 2011년에 동일본 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긴요하게 사용된 것이 ‘라이프스트로(생명의 빨대)’였다. 해안가에 쓰나미가 몰려오면 오물과 물이 뒤범벅이 되고 1주일 이내에 콜레라, 이질, 설사 같은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다. 상황이 긴박하므로 바이오샌드필터와 세라믹정수기와 같이 부피와 무게가 나가는 제품을 긴급구호제품으로 투입하기가 어렵다. 이때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부피가 작고 가벼운 라이프스트로이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베스터가드 프란센에서 제작한 라이프스트로는 개인이 휴대하며 지표수를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개인용 정수기로 1년간 사용이 가능하다. 미국 카터재단이 기니벌레병을 막기 위해서 개발한 파이프형 간이정수기를 베스터가드 프란센에서 2005년 상품화한 것이다. 2세대 제품은 중공사막(hollow fiber membrane)을 사용해 정수하며,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99% 이상 제거할 수 있다. 개도국 주민이 5,000개 이상 대량 구입할 경우 개당 10달러 이하로도 구입 가능하다.
물을 살균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끓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나무를 때야 하고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베스터가드 프란센은 케냐에 20만개의 라이프스트로를 보급한 뒤 이를 통해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였다고 탄소마켓시장에 보고해 보조금을 수령하는 ‘카본 포 워터’라는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선진국에서 사용 가능하도록 고안된 또 다른 식수 관련 적정기술 제품으로 미국 메리디안 디자인에서 개발한 휴대용 정수기 ‘아쿠아스타’가 있다. 건전지로 작동되는 자외선 램프에서 254㎚ 파장의 자외선이 나와 즉시 살균해 설사 콜레라 이질 등 각종 수인성 질병을 예방한다. 개당 가격은 약 70달러이다.
선진국 사람들이 수돗물 대신 페트병에 든 생수를 사 마시는 가장 큰 이유는 수돗물 속 염소 또는 휘발성유기화합물로 인해 물 맛이 쓰고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엄청난 페트병 쓰레기가 발생하고 재활용되는 것은 10~20%에 불과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서 개발된 제품이 ‘보블’이다. 활성탄 필터로 수돗물을 정수하면 물 맛이 좋고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필터는 1년 가량 사용하며 탈부착이 가능해서 필터만 별도로 구입해서 교환할 수 있다. 가격은 약 10달러 정도다.
미국에 있는 물 관련 NGO는 “Water is Life”라는 모토를 내걸었다. 말할 나위 없이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하지만 물 사정이 좋지 못한 개도국에서 대규모 급수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자금 문제로 쉽지 않다. 선진국에서도 급작스런 단수가 장기간 발생할 때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물 관련 적정기술 제품 개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홍성욱 국립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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