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택이 살아남기를 바랐다. 모두들 힘들 거라고 예상했고 솔직히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시장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신은 끝내 기적을 용인하지 않았다.
지난 달 새 주인을 찾으려는 세 번째 입찰마저 무산되자 결국 팬택은 지난 26일 파산법원에 법정관리폐지를 신청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이제 그만 인공호흡기를 떼어달라는 요청이었다. 법원도 당연히 받아들일 것으로 본다. 남은 자산으로 빚 잔치를 끝내면 팬택이란 이름은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개 기업이 문을 닫는다. 퇴출은 기업 생태계의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다. 생계가 막막해진 종업원들과 협력업체의 피눈물 나는 사정은 너무도 안쓰럽지만, 한계기업의 몰락은 시장에 균형을 찾아주는 순기능도 있다. 외환위기 전후 대마불사 원칙이 폐기된 이래 지금까지 막을 내린 기업 중엔 팬택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국민경제적 파급효과가 막대했던 곳이 얼마든지 있다.
1991년 자본금 4,000만원 짜리 삐삐(무선호출기)회사로 창업해 글로벌 휴대폰회사로 성장했던 팬택을 두고 다들 ‘벤처신화’를 얘기하지만, 사실 신화적인 걸로 따지면 훨씬 더 드라마틱한 기업들도 많다. 전 세계 검색시장을 평정한 구글이 유독 한국에서만 힘을 쓰지 못하는 건 온전히 네이버 때문이다. 설립 10년도 못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거대 인터넷제국을 구축한 네이버는 신화 그 이상임에 틀림없다. 대중들의 커뮤니케이션 방식 자체를 바꿔 놓은 카카오도 있고, 게임을 엔터테인먼트이자 스포츠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산업으로 격상시킨 넥슨과 NC소프트도 있다. 사이버 보안시장에서 독보적 위상을 구축한 안랩도 빼놓을 수 없다. 잠깐의 영화를 맛본 뒤 긴 몰락의 길을 걸었던 팬택과 달리, 이들은 지금도 거침없는 성공신화를 써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택의 파산이 더 안타깝고 못내 아쉬운 건 우리나라 기업사에서 이 회사가 차지하고 있는 각별한 의미 때문이다. 네이버 넥슨 카카오 안랩에는 없지만 팬택에는 있는 것, 그건 바로 제조업이란 사실이다. 제조업, 그것도 최첨단기술과 감성충만의 디자인, 정교한 마케팅포인트를 요구하는 IT 완제품 분야에서 벤처로 출발해 10년 만에 국내 넘버2 자리에까지 오르고 세계시장에서도 당당히 명함을 내밀었던 기업은 적어도 내 기억엔 팬택 하나뿐이다.
네이버 넥슨 같은 IT서비스ㆍ콘텐츠업체들의 성과를 저평가할 생각은 없다. 누가 뭐래도 경이적인 기업들이다. 하지만 제조업의 도전은 훨씬 힘들고 버겁다. 많은 투자가 들어가 야 하고, 투자금의 회수기간은 길고, 회수되는 수익은 불확실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과 기술과 브랜드파워가 축적된 대기업이 아니고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제조업이다. 돈과 시간을 견뎌낼 인내가 없다면 혹은 미치지 않고서는, 요즘 세상에 부품도 아닌 IT 완제품을 만들어보겠다고 벤처깃발을 드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팬택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돌이켜보면 팬택은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근본적인 자본력의 열세에다 조급함에서 비롯된 무리한 확장, 괴물 스마트폰의 등장,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삼성ㆍLG(국내)와 삼성ㆍ애플(글로벌)의 양강 구도, 보조금과열과 이동통신사 영업정지, 정부 규제(단통법)… 아마 팬택의 실패이유를 열거하라면 한 백 가지쯤은 될 것 같다. 팬택 정도의 기술력과 인지도를 가진 기업이라면 싼 값에라도 인수자가 나서는 게 정상처럼 보이지만, 실상 극한 경쟁이 진행되고 있는 현 스마트폰 시장에선 그럴 여지조차 없었다.
한국의 간판 IT기업은 누가 뭐래도 삼성과 LG다. 아마 10년 20년 뒤에도 이들이 한국경제를 이끌 것이다. 하지만 팬택처럼 고개를 빳빳이 세운고 당돌하게 덤벼드는 기업도 가끔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생태계에 활기가 돌고, 젊은 창업가들의 승부욕도 꿈틀대지 않을 까. 하지만 그런 회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조업 벤처신화는 이걸로 끝이라는 예감이 든다. 팬택의 퇴장이 마냥 아쉬운 까닭이다.
이성철부국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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