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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그림자 인생의 찬란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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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그림자 인생의 찬란한 죽음

입력
2015.05.2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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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 글, 프리드리히 헤헬만 그림

퇴근길 길고양이를 살금살금 따라가다 오랜 만에 마주쳤다, 내 그림자.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듯한 그 검은 것은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피터팬의 그림자가 도망을 쳐서 웬디가 꿰매 주었다지.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사나이도, 그림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뺏긴 학자도 있었다지…. 인적 없는 밤, 제 그림자에 흠칫한 아줌마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그림자는 어두운 나, 억압받는 욕망을 상징한다. 문제적 인간을 다루는 문학의 매력적 소재다. 안데르센의 ‘그림자’는 자기파괴에 대한 섬뜩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자에게 지위를 뺏기고 살해당한다. 그림자를 악마적으로 묘사한 안데르센과 달리, 그림자를 껴안아야 할 자아의 한 부분으로 그린 작가도 있다.

극장 무대 밑에서 배우들에게 대사를 불러주던 일을 하던 오필리아.
극장 무대 밑에서 배우들에게 대사를 불러주던 일을 하던 오필리아.

미하엘 엔데가 쓴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은 수많은 그림자를 가진 늙은 여인의 이야기다. 유명한 연극배우가 되라며 부모가 오필리아(햄릿의 연인)라고 이름 지었으나, 목소리가 작아 무대 밑에서 대사를 불러주는 일을 하며 홀로 살았다. 자본주의의 밀물에 소도시 극장이 밀려나 실직한 후, 주인 없는 그림자들이 그에게 찾아오기 시작한다. 오필리아는 그림자들과 함께 살며 밤마다 연극을 가르친다. 그러다 동네 사람들의 곱잖은 시선에 쫓겨나 방랑하다가 그림자 이동극장을 차린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그림자인 ‘죽음’을 받아들인 오필리아는 그림자들과 천국으로 올라간다.

오필리아가 두번째로 받아들인 그림자의 이름은 '무서운 어둠'. 교회에서 만났다.
오필리아가 두번째로 받아들인 그림자의 이름은 '무서운 어둠'. 교회에서 만났다.

‘무서운 어둠’ ‘외로움’ ‘밤앓이’ ‘힘없음’ ‘덧없음’…. 오필리아가 받아들인 그림자들에겐 이름이 있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회한과 고독 속에서 늙어가는 오필리아가 느꼈던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는 그것들을 피하지 않고 껴안아 인생의 단 한번,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그와 천국에 간 그림자들은 빛나는 영혼이 되어 ‘오필리아의 빛 극장’에서 공연한다. 그림자들, 심지어 ‘죽음’까지 내치지 않고 거둬 ‘그림자 극장’은 ‘빛 극장’으로 거듭난다. 자신 속의 어둠을 받아들여야 빛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평생 ‘그림자 인생’이었던 오필리아의 찬란한 죽음이 말해준다. 42세의 안데르센이 쓴 ‘그림자’가 인생의 어둠을 이야기한다면, 59세의 미하엘 엔데가 쓴 이 작품은 인생의 어둠을 껴안는 초월을 이야기한다.

오필리아는 연극으로 그림자들을 치유한다. 그림자들은 오필리아에게 오기 전엔 외로웠고, 오필리아의 작은 방에 모여 살면서부터는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극을 하면서 달라진다. “이제 그림자들은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림자들은 어느 역할이든 모두 해낼 수 있었으니까요.” 연극은 재미있는 놀이이자 심리치료의 한 방편이다.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은 한국의 어린이 연극 무대에도 여러 번 올랐다.

오필리아의 방을 가득 채운 그림자 연극의 향연
오필리아의 방을 가득 채운 그림자 연극의 향연

쉽게 읽히면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미하엘 엔데의 글이 프리드리히 헤헬만의 안성맞춤 그림과 만났다. 작은 방을 가득 채운 그림자 연극 향연, 오갈 데 없어진 오필리아가 바닷가에서 주저앉은 뒷모습, 눈보라 속에서 죽음을 맞닥뜨리는 장면 등 펼친 면의 그림이 환상적이다.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은 아이들에겐 흥미진진한 판타지이고, 어른들에겐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속 깊은 이야기이다. 특히 자신의 그림자가 낯설어지기 시작한 이들이 곱씹어 볼 만하다. 그림책은 인생에서 세 번 읽어야 한단다. 어릴 때, 아이를 기를 때,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이 책이 정말 그렇다.

김소연기자 au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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