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모든 정치는 땅덩어리에 관한 것이다. (…) 포스트모던 정치는 지역적인 차원에서나 세계적인 차원에서나 본질적으로 토지 수탈에 관한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학자 프레더릭 제임슨은 3월 ‘뉴 레프트 리뷰’에 기고한 ‘특이성의 미학’을 통해, 이 시대의 정치적 문제는 모두 공간과 결부돼 있다고 지적했다. 근대 급진적 정치의 원동력 또한 공간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도시이론가인 앤리 메리필드의 신작은 이런 사유의 연장선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공간, 도시에서 오늘날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책의 진가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메리필드 사유의 젖줄, 앙리 르페브르의 주장을 먼저 봐야 한다. 르페브르는 대표작 ‘공간의 생산’에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유물론적 관점-토대와 상부구조로 이루어진 생산양식에 따라 역사가 구분되며, 토대의 모순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에다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의 공간을 생산한다’는 전제를 덧붙여 마르크스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은 기존의 공간 질서에 대한 전복과 새로운 공간의 탄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요컨대 각각의 사회와 생산양식은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뿐만 아니라, 공간에 의해서도 구별된다는 말이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근대의 도시는 자본의 높은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장이고,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위계적으로 재편된 곳이자, 19세기 파리 코뮌처럼 연대와 소통의 가능성이 구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파리 코뮌으로 대표되는 ‘유토피아적 노선’이 완벽한 사회 또는 기성 사회에 반하는 비현실적 공간을 지지한다면, 저자 메리필드는 ‘헤테로토피아 노선’(철학자 서동진)을 따른다.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사회제도 안에서 디자인되어 있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현실화된 유토피아 장소’라고 정의하는데, 메리필드는 이런 장소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분투한다.
저자는 21세기 자본주의 시대 헤테로토피아의 장으로 ‘행성 도시’를 제시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SF소설 ‘파운데이션’ 속에서 행성 통째로 하나의 도시로 만들어진 트랜터처럼, 기술 발달로 공간의 위계질서가 무뎌지며 도시의 안팎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공간이다. 그는 ‘(도시의) 중심성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중심성에 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사회적 공간을 구축하고, 도시적인 것을 규정하는 행동의 장소’가 바로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라는 주장이다.
도시의 새로운 중심에서는 ‘마주침의 정치’가 실행된다. 수직으로 떨어지던 비가 다른 빗방울들과 이리저리 엇갈려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두드리고, 서로에게 쌓이듯’ 사람들의 마주침이 이루어진다. 저자는 바로 그 우연한 순간 새로운 실재, 즉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점령’ 시위가 벌어진 뉴욕의 주코티 공원이 바로 이런 마주침의 공간이다. 맨해튼과 런던의 공원, 카이로와 마드리드의 광장, 서울의 광화문까지 저항이 벌어지는 도시 공간이 바로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위대한 주체로 거듭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작지만 거대한 책’이란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의 추천사에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넘어야 한 산이 많다. 르페브르의 이론을 독자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상정한 채 우리말로 옮긴 불친절한 번역이 아쉽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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