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그림책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 는 1963년에 발간되었다. 엄마는 장난치는 맥스를 방에 가뒀는데 그날 밤 방에서 나무와 풀이 자라기 시작했고 그러다 세상 자체가 되어버린다. 맥스는 그곳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한 다음 괴물들의 나라에 도착한다. ‘괴물중의 괴물’ 인 맥스는 그곳의 왕이 되고 함께 소동을 벌인다. 그렇게 실컷 놀다 보니 쓸쓸해져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별 문제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엄마들이 분개하여 들고 일어났다.
엄마가 소리쳤다. “이 괴물 같은 자식!” 맥스도 소리쳤다.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 이 부분에서 놀라 자빠진 것이다. 자식이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라고 외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청교도 정신을 삶의 근간으로 한다는 백인 중산층 부모들이 받은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당시 미국의 교육, 문학, 아동심리학 전문가들도 어린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고 도서관에서는 대출조차 해주지 않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지금이야 별스러울 것도 없고 되레 귀엽기까지 하지만 그 시절에는 파격적인 괴물 그림도 한몫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2,00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그림책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1964년 칼데콧상 수상 소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들은 매일매일 두려움, 걱정과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갖고 살아가고 있고 나름대로 그것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런 사실을 너무 무시한다.”
현재의 국내로 돌아와 보자. 지난 3월 발간된 ‘솔로 강아지’란 동시집이 있다. 열 살짜리 초등학교 여자아이가 쓴 것인데 그 중에 특히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제목의 작품 때문에 시끄러웠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끔찍하다는 느낌이 드시나? 그럴 수 있다. 특히 한 여자 아이가 엄마로 보이는 존재 옆에 앉아 피를 묻힌 채 심장을 먹고 있는 삽화도 그려져 있으니까. 그러나 이게 그 아이 한 순간의 진심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게 우연도 아니고 극히 일부분도 아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몇 번씩 그런 생각을 한다면 어쩌겠는가.
이 시가 잘못된 거라고 보는 이들은 아마 이런 작품을 좋아할 것이다. ‘커다란 황금물감 푹 찍어/ 가을들판에 가만가만 뿌려놓았다/ 탱글탱글 누우런 벼이삭/ 살랑살랑 가을바람 불어오면/ 빠알간 고추잠자리/ 두둥실 두둥실 흥겨운 춤사위/(후략)’ 안도현 시인 책에서 빌려온, 초등학교 6학년이 쓴 시이다.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는데 화려한 묘사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감동도 없다. 그저 예쁘기만 하다. 이런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아이들 속마음 때문에 골치 아프기 싫어하거나 동심이란 으레 이래야 한다고 여기는 아주 단순한 이들이다.
사람 마음속에는 슬픔, 공포, 우울, 분노 같은 게 뒤죽박죽 모두 들어있다. 모리스 샌닥의 말처럼 애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어른은 얼마 전까지 어린이였고 지금 애들도 곧 어른이 된다. 아이가 밥 먹고 큰 게 고작 어른이니까. 보통의 글짓기에서도 보면 부모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반성을 자주하는 아이는 억압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 십상이다. 반대로 사랑 받고 큰 아이는 부모를 제멋대로 표현한다.
파문이 일자 출판사에서는 시집을 전부 회수했다고 한다. 나는 잔혹성보다 저자의 뛰어난 자질이 문제로 보인다. 열 살짜리가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 세련되고 호흡이 안정되어 있다. 어른이 개입한 혐의가 보인다는 것이다. 만약 혼자 써낸 거라면 그 아이는 천재일 것이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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