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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통일의 두 방식

입력
2015.05.2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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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통일은 두 번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의 후삼국통일이다. 그런데 두 통일방식은 크게 달랐다. 먼저 신라는 물리적 통합에 치중했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660년) 7월 13일자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의자왕이 측근들과 야밤에 웅진성(熊津城)으로 도주하자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융(隆)이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신라의 태자 법민(문무왕)은 융을 말 아래 무릎 꿇게 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죽여서 옥중에 묻었는데, 이것이 20년 동안 나를 마음 아프고 골치 썩게 했다. 오늘 네 목숨이 내 손안에 있다”라고 모욕했다고 한다. 이때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의자왕은 즉위 다음해(642년) 8월 당항성을 치는 것처럼 위장한 후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켰다. 이때 대야성 성주 김품석(金品錫)과 그 부인 고타소가 자살했는데, 고타소가 바로 태종무열왕의 딸이자 법민의 누이였다.

‘화랑세기’는 김춘추(태종무열왕)가 딸 고타소를 ‘몹시 사랑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는 고타소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가 ‘기둥에 의지해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짝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그 충격의 정도를 말해주고 있다. 김춘추는 이후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라고 말한 후 백제 멸망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 이 사건이 백제와 신라, 두 나라를 사생결단의 전쟁으로 끌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누이의 죽음에 분개했어도 이는 나라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지 개인적 원한관계는 아니었다. 그런데 개인적 원한으로 이 사건을 바라본 김법민은 패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이 말 아래 무릎 꿇게 하고 얼굴에 침을 뱉는 모욕으로 갚았다. 그래서 백제부흥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백제가 끝내 멸망한 지 25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등장해 후삼국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반면 왕건의 통일방식은 달랐다. 왕건은 화학적 통합에 주력했다. 왕건은 호족들의 군사적 반발에는 진압으로 대응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회유정책의 하나가 각지의 호족들에게 후한 폐백을 주며 자신을 낮추는 ‘중폐비사(重幣卑辭)’정책이었다. 즉위년(918년) 8월 왕건은 “짐은 각처의 도적들이 짐이 처음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혹 변방에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된다”면서 “각지에 단사(單使)를 파견해 후한 폐백을 주며 말을 낮추어서(重幣卑辭) 혜화(惠和)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려사’ 태조 원년 8월)”고 말했다.

‘변방에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는 세력은 도적보다는 각지를 장악한 호족들이었다. 왕건은 이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대신 사신들을 보내 후한 폐백을 주면서 자신을 낮췄다. 각지의 호족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송악(松岳ㆍ개경)의 호족에 지나지 않았던 왕건이 국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중폐비사’ 조치에 마음을 풀고 국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혼인정책도 마찬가지였다. 왕건은 6명의 왕비를 포함해 모두 29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중 왕건이 사랑해서 결혼한 여인은 신분이 낮았던 나주 출신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머지는 모두 호족의 딸들로서 이 역시 각지의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왕건은 또 자신의 정적이었던 명주(溟州ㆍ강릉) 호족 순식(順式)이 아들 수원(守元)을 보내 귀부하자 왕씨 성과 전택(田宅)을 내리는 등 사성(賜姓)정책을 통해 유력호족들과 의제(擬制)가족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런 호족융합정책의 성과에 힘입어 왕건은 대신라적대정책으로 민심을 잃은 견훤을 꺾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사는 왕건의 통일방식은 각지의 호족들을 고려 내로 자연스레 통합하게 했고, 이후 고려 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후백제니 후신라니 하는 말들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천안함 사건이 계기가 된 대북 봉쇄조치인 5ㆍ24조치 5년째를 맞아 그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참에 5ㆍ24조치 해제 여부를 넘어서 우리는 어떤 통일정책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상대에게 침을 뱉는 신라식 통일인지, 상대의 마음을 사는 고려식 통일인지 긴 안목으로 본다면 그 답은 자명하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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