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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우리집 누수사건

입력
2015.05.2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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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부엌의 등이 깜박거렸다. 불을 꺼도 다 꺼지지 않았다. 그런가 보다 그랬다. 접지가 불량한가? 그래도 좋아지겠지 그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이런. 물이 떨어진다 싶더니 급기야 전기도 끊어지고 도배한 천장도 일어났다. 그야말로 무슨 일이 천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우선 우리 집의 간단한 브리핑. 열 가구쯤의 세대가 모여 사는 1998년산 다세대 빌라다. IMF 시절에 집을 지어 부도가 나기는 했으나 나름 국회의원도 테이프커팅을 할 만큼 짱짱하고 유서가 깊다. 언젠가 이 지면에도 썼지만 집을 구할 때 그 많은 신축 빌라를 보았으나 보았던 집 중에 여기가 가장 훌륭하다고 단언하며 선택한 집이다.

그런 튼튼한 집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뭐가 잘못됐다. 윗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다분히 방어적이다. 물을 쓴 적이 없단다. 아랫집에 떨어지는 물은 무슨 영문이냐 그랬더니 사람을 불러서 제대로 알아보고 얘기를 하라신다. 일하는 사람을 불러서 물었다. 그 분께서 윗집을 봐야 한다며 올라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다짜고짜 화를 내시며 그런 일이 없다고 하신다!

꼬이기 시작했다. 공사를 하려던 분은 도리어 상처를 받아 분통이 터져서 돌아갔고 윗집과 우리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런 어느 날, 윗집에서 정황을 파악하셨던지 느닷없이 공사를 해주시겠단다. 그러면 그렇지. 도배하는 사람도 불렀고 싱크대도 뜯었다. 뜯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천장은 곰팡이가 슬었고 집안은 삽시에 심란해졌다. 동네에 사시는 도배사가 오셨다. 그 분은 열심이었으나 내 눈에는 대충이었다. 여기서 대충이란 급하게 하셨다는 뜻도 있고 옛날 처음 우리가 이사 올 때 붙인 벽지나 원상복원과는 한참 멀게 느껴지는 여러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양해를 하였다. 그 다음에 싱크대를 원상 복원하는 비용이 20만원 가량이 남았다. 그런데 그 비용은 절대로 부담을 하지 못하시겠단다.

올라갔다. 다해주었고 더 이상은 일 없다며 다짜고짜 자네 몇 살이야 라며 언성이 높아졌다. 말을 하다가 문득 추해져 있는 내가 보였다. 사실 20만원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만큼으로 살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묘한 감정적 집착까지 겹쳐서 제어가 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분란의 시작은 돈이 아니다. 어떤 발단에서 시작되었든 나름의 예의와 배려에 대한 관점의 문제였다. 오래된 집에서 일어난 일이니 사실 그분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방어할 까닭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아내와 반나절이 지나 통화했다. 우리가 싱크대를 붙이고 끝내자. 그런데 아내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싱크대를 뜯으라고 한 사람이 그 쪽이었고 천장도 그렇게 상태가 안 좋은데 어떻게 포기하느냐며 발끈했다. 그래도 그러지 말자고 했다. 몇 시간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그러면 자기는 반상회를 해서라도 이 문제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낡은 빌라에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선례를 만들면 되겠느냐고. 맞는 말이었다. 그래 좋다. 반상회를 소집하자. 그리고 반상회가 전 주에 열렸다. 열 가구 중에 두 집이 모였다.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위아래 두 집이 알아서 잘 정리하라는 결론. 그렇게 우리 집 누수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결국 무기력한 패자로 남았다. 권익도 못 찾았고 자존심의 상처도 받았다. 더군다나 앞으로 있을지 모를 공동주택의 여러 분쟁을 해결할 원칙도 찾지 못했다. 관용, 내지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새삼 배웠다. 법 없이 사이 좋게 살기는 힘든 것일까. 민사로 해결하라는 주변의 권고처럼 마음에 안 드는 제안도 없었다. 그러나 역시 법은 있어야 한다. 삼가 부탁한다. 법을 잘 만들어주시라. 그리고 법은 상식의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라.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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