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에 본 ‘유령작가’란 영화의 한 대목이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총리를 빗댄 것처럼 보이는 영국 총리 애덤 랭(피어스 브로스넌 분)은 영국 정부가 테러 용의자의 신상정보를 불법적으로 미국에 넘겨줬다는 혐의로 궁지에 몰린다. 흥분한 랭 총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총리에 재선되면 공항 검색대를 두 줄로 만들 거야. 한 줄은 철저히 검색해 테러용의자를 색출하고, 한 줄은 아무런 조사도 않고 따라서 인권침해 가능성이 전혀 없게 만들어 각각의 비행기에 타게 하는 거야. 그렇게 했을 때 나를 비판하며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줄에 서는지 보고 싶어.” 정확하진 않겠지만 대체로 이런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를 보면서 ‘이건 참 교묘하게 왜곡된 선택지인걸’이란 생각을 했었다. 왜냐면 민간항공기가 테러의 위협을 받게 된 건 검색이 허술해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인종 차별, 지하자원을 둘러싼 탐욕이 오랜 기간 뒤엉키며 쌓인 분노가 그 근본원인이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비행기의 안전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이 영화대목이 떠오른 것은 요즘 전세계 곳곳에서 이와 유사하게 왜곡된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미국에서 다음달 1일로 시효가 끝나는‘애국법 215조’ 연장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현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은 법안 수정을, 공화당 상원 지도부는 원안 고수를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이 와중에 대선 출마를 선언한 공화당 중도파 랜드 폴 상원의원은 지난 20일 법의 시한 연장을 저지하기 위해 10시간30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폴 상원의원은 “여러분은 안전을 위해 자유를 포기할 생각입니까?”라며 정부가 국민들의 통화내역을 마음대로 감시하게 놔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13년 6월10일 미 중앙정보국(CIA)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테러 용의자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의 전화통화기록이나 이메일 팩스를 주고 받은 기록 등 개인정보를 무차별 수집하고 있다고 폭로했는데, 이런 개인정보 수집의 근거가 된 법조항이 바로 ‘애국법 215조’이라는 게 밝혀진 후 일약 유명해졌다.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만들어진 이 법은 인터넷 등 디지털 정보망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점차 괴물로 변해 갔다. 스노든의 폭로에 따르면 NSA는 대부분 인터넷 망이 미국을 거쳐간다는 점을 이용해 마음만 먹으면 전세계의 어떤 통화내역과 인터넷 정보도 감시할 수 있다. 미국 유타주 사막 한가운데에 15억달러(약 1조6,300억원)을 들여 구축한 NSA 본부는 자체 용수 공급시설과 발전설비를 갖춘 첨단시설로 전세계 통신망을 샅샅이 살필 능력을 갖췄다. 이 곳의 데이터 저장용량은 수백만명을 24시간 1년 내내 감시한 동영상을 저장하고도 남을 정도다.
이런 가공할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론 폴 상원의원의 반대는 절박하고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인 다수는 이법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미국시민에 대한 무차별 감청에 대해서는 ‘수용하겠다’는 의견이 40%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이나 국내외 정치지도자에 대한 감청의 경우는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50%를 넘어섰다.
프랑스에서도 이달 초 정보기관의 감시권한을 대폭 강화한 대테러법이 하원에서 압도적으로 통과돼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중시한다는 프랑스의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영국과 독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당장 자신과 가족의 안위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인권이나 프라이버시 같은 문제는 한가한 요구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테러의 위협을 없앨 근본적 대책은 중동에서부터 확산되고 있는 서방에 대한 적대감을 완화시키고 이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통신의 자유 보장은 물론이고 공항 검문 검색대에서 인종과 국적에 의해 차별 받는 행태가 사라져야 한다. 성벽만 높이 쌓는다고 성의 안전이 지켜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행하게도 테러의 위협을 앞세워 국민을 호도하는 정치인이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닌 현실이다.
정영오 국제부장 young5@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