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국민의 대표자 역할보다 정당의 충실한 조직원으로 전락”
1992년 중위 때 軍부정투표 고발… '추첨민주주의 강의' 책 출간

“대표를 선거 말고 제비 뽑기로 앉히자고 하면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이겠죠. 이상한 사람이 추첨돼 무책임하게 할 거라는 논리죠. 입으로는 민중 대중 시민의 힘을 외쳐도 정작 각 개인은 믿지는 못한다는 얘기에요.”
이지문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연구교수(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소장)는 1992년 육군 중위 복무 당시 지휘부가 여당 후보에 투표하도록 종용한 군부재자 부정투표 실상을 고발해 한국 선거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의 양심선언 이후 군인들도 영외에서 비밀투표를 할 수 있게 됐고 이 때문에 그는 대중에게 정치학자보다 ‘이지문 중위’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공정선거를 지켜내기 위해 양심고백, 연행, 군사재판 등 고충을 무릅쓴 그가 수년째 선거가 아닌 추첨의 가치를 연구하는데 매진하고 있다. 2011년 박사논문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는 곳곳에 추첨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데 이어 관련 이론서를 내놨다. 최근에는 이를 쉽게 풀어 쓴 ‘추첨민주주의 강의’(삶창)를 펴냈다.
20일 서울 마포구 연세대 캠퍼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시민들이 그렇게 지켜내려고 했던 선거가 과연 공정하게 운영되는가, 또 선거 결과가 과연 최선을 만들고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나 국회가 국민의 대표자로서 역할을 하기보다 정당의 충실한 조직원으로 전락했다”며 “자유 평등 대표성 통합 공공선 등 민주주의 핵심가치들이 심각하게 훼손돼 국민의 자기지배원칙으로부터 우리 현실이 너무 멀리 벗어났다”고 지적했다. 96년부터 한 차례 서울시의원을 지내기도 한 그는 “안팎에서 목격한 정치권이 지나치게 생활정치와 괴리된 논쟁에 몰두하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유사성이 너무 떨어지죠. 유명인사가 되지 않고서야 선거 출마하려면 공천, 경선 등 갖은 비용을 감수해야 하니 지방의회부터 주로 토호나 관변단체 출신 40~50대로 채워지잖아요. 평범한 회사원, 주부, 노동자의 목소리는 없어요. 그렇다고 이들이 시민보다 더 지역살림을 잘 알거나 학력이 높은 것도 아니에요.”
이 교수는 이런 괴리를 좁히기 위해 추첨으로 구성된 여러 시민기구가 곳곳에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발현된 고대 아테네에서는 ‘공직을 포함한 사회적 재화가 모든 시민들 사이에 동등하게 배분돼야 한다’는 원칙 하에 평의회가 제비 뽑기로 구성됐다. 그가 제안하는 현실적 대안은 국회 자문위원회, 정부 정책 배심원단, 기소 배심원단, 지자체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시민위원회 등을 각 회기 추첨으로 구성해 활동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추첨방식 기구가 국민참여재판 배심원단인데 이미 배심원과 재판부 판단이 90%이상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냐”며 “똑같이 추첨을 통해 선발된 국민 위원회가 현안에 대해 숙의 논쟁 합의하는 과정을 통해 국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검찰의 기소여부를 배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세월호특별법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 국회의 현실인데, 아마 그런 기구가 있었다면 이 문제도 진작 해결되지 않았겠냐”고 덧붙였다. 실제 캐나다의 경우 2개 주에서 선거개혁 시민총회를 추첨제로 운영한 사례가 있다.
“소위 진보 인사라고 하는 분들도 추첨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정치가 로또냐’는 냉소를 보이기 십상이에요. 정치는 운동가나 엘리트 출신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믿지 못하면서 시민들에게 표는 달라고 왜 하나요. 조금 부족한 분이 뽑히면 다른 위원이나 온 국민이 더 관심을 갖고 도울 수도 있어요.”
그는 시민덕성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추첨의 가치를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스스로도 민주시민이라고 자부할 수 없을 정도로 삼삼오오 모여 토론하는 교육을 받아 본적도, 정치에 참여하는 훈련을 해 본일도 없잖아요. 추첨민주주의가 아직도 낯설다면, 학급반장부터라도 추첨제로 해 여러 아이가 책임 있는 자리와 정치관념, 토의문화를 익힐 수 있도록 가르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ㆍ사진=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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