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나만 아니면 된다고?

입력
2015.05.25 14:34
0 0

볕 좋은 봄날 주말 오후 평창동 길을 툴툴대며 걷는다. 주차장이 있을 리 만무한 소극장 공연을 볼 요량으로 현관을 나서며 잠시 망설였는데. ‘뭐 얼마나 걷겠어’ 싶었건만 아차, 어지간한 허세가 꺾이고 남을 나이에도 조금 남은 허영이 하이힐에 발을 구겨 넣으라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트렁크에 실린 운동화 생각이 간절할 때 편해 보이는 의자를 만났으니 그 반가움에 꽤 값나가는 커피 맛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답답한 공기가 짓누르는 소극장에 들어가 앉았다. 조악한 세트가 반쯤 흥미를 떨구는데 의외로 다양한 연령대 관객들이 빼곡히 객석을 채우더니 윗집 아저씨, 아래층 누이 같아 뵈는 배우들이 사람 사는 얘기를 시작한다. 해고된 비정규직 근로자와 파업을 주동했기 때문에 사측의 억대 손해배상 청구에 월급까지 차압 당한 이들이다. 나아질 것이란 희망은커녕 자식에게 남길 유산이 부채밖에 없는 사람들 얘기다. 결국 궁지에 몰려 죽을 각오로 철탑에 올라가며 막을 내리는데. 작품을 권했던 선배의 “현실은 더 처참한데 우리 부모들이 세상에 던졌던 질문을 포기한 요즘 이런 작품은 찾기 힘들다”는 말에 뱃속에서 커피 향에 섞인 쓴 물이 올라온다.

언제나 입바른 소리를 해댔다. “100년 뒤 200억에 팔릴 그림도 아니고, 음반처럼 개인이 소장할 수도 없는 공연예술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지금 공유할 수 없으면 무대에 올라올 이유가 없다”고. 그러나 ‘어떤 이유로 무대에 서건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박수를 받는 것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니 주변 모든 것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 역시 한 시간 반여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 사는 얘기에 낯설고 괴로웠다. 그리고 떠올렸다. 국민들이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매체, 텔레비전에 남은 거의 유일한 메시지 ‘체념’ 그리고 ‘나만 아니면 돼.’

미국에서 자라 프랑스 유명 무용단에서 활동하다 귀국해 20년째 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안무가를 만났다. 그는 노숙자들을 무대에 올리고, 가족 동화를 작품으로 내놓는 사람이다. 그래서 물었다. “상주하고 있는 극장이나 소속된 시가 커뮤니티 활동을 강요하느냐”고. 어렵게 꺼낸 질문이 무색하게 돌아온 답은 간단하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나와 내 동료들은 뉴욕시의 얼굴이었어요.” 예술은 도시의 여러 얼굴 중 하나이며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해야 내 삶의 질도 높아지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국민이 낸 세금과 독지가의 후원을 받을 자격은 시민들과 소통할 때 얻는 것이기 때문에 바쁘고 지쳐서도 그들과 계속 만나다 보면 의외의 영감은 물론 다른 활력도 얻는다”고 했다.

구스타보 두다멜을 세계적 이슈로 만들어준 베네수엘라 빈민가 청소년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가 한동안 화제였다. 콜롬비아 ‘엘 꼴레히오 델 꾸에르포’는 마약과 빈곤에 노출된 청소년을 춤으로 치료해 사회로 돌려보낸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공연계에도 커뮤니티 예술 활동이 유행처럼 번졌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과 남들도 하니 ‘이타심으로 해야 할 일’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냐 빈민촌 아이들의 지라니 합창단과 이를 만든 목사간 진실공방을 떠나 국내 한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시 오고 싶어요.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이라고 말하던 16세 소년의 얘기에 울컥한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작년 ‘서울댄스프로젝트’에 참가했던 한 가장은 공연 한달 전에 아들을 잃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춤을 추었고 “상상할 수 없던 위로를 얻었기 때문에 올해도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한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들은 죽음으로 내몰리고, 고단한 삶이 나아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러나 예술이 이렇게 “당신 일이 내 일”이라며 손을 내민다면, 억울하게 많이 뜯기는 세금이지만 낼만하지 않은가.

김신아 아트 프로듀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