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샤록은 23일 “한국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한국은 단 한 번도 미국의 정치외교적 판단에서 독립변수였던 적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미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특수부대 투입을 알고도 묵인했다.”

지금부터 약 20년 전인 1996년 미국인 저널리스트 팀 샤록(64·티모시 스콧 샤록)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애초 미국 정부는 89년 국회 광주특위의 질의에 보낸 답변에서 “우리는 (특전사 투입을) 몰랐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샤록은 일명 ‘체로키 파일’이라는 미 극비 문서를 발굴, 미국 정부는 이미 10·26 직후부터 신군부의 동향을 면밀히 관찰했으며,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등을 위해 광주로의 특수부대 투입을 묵인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고 세계에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해 올해 광주시는 그를 초청해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한국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지닌 그는 24일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 세계적 여성 시민운동가들이 DMZ를 통과하는 ‘위민 크로스 DMZ(Women Cross DMZ)’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하루 전인 23일 참여연대가 운영하는 서울 통인동 ‘카페 통인’에서 샤록을 만나 인터뷰했다.

-어렸을 때 한국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그 때문인가?

“선교사 가정이어서 7세까지 일본에서, 8~10세 때는 한국에서 살았다. 9세였던 1960년에는 4·19 항쟁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학생들, 시민들의 함성과 피 흘리는 부상자들이 거리에 넘쳤다. 너무나 강렬했다. 그 다음날 생애 처음으로 신문기사를 오려 클리핑했다. 미국에 가서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 노동 운동에 대한 소식을 계속 찾아봤다. 한국 민주화엔 노동운동의 공로가 큰데 경제 분야 기자를 하면서 이에 대해 계속 취재했다. 지금도 매일 코리아 타임스와 한겨레 영문판 등을 통해 한국 뉴스를 본다. 미국 언론이 한국 보수지가 보도하는 북한 관련 뉴스를 확인 없이 받아쓰는 경우가 있는데 큰 문제다.”

-광주항쟁에 대해 취재를 시작한 계기는?

“부마항쟁, 광주항쟁 당시 미국에 있었지만 매일 한국 뉴스를 보고 개인적인 네트워크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81년 한국에 와서 광주항쟁 당시 외과의사였던 분을 만나 참상을 들었다. 85년에도 한국에 와서 시민·노동운동가들을 만났고 당시 야권 지도자이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는데 김포공항에서 소지품이 세관에 걸리고 말았다. 광주항쟁 당시의 참상을 찍은 사진 등을 압수한 한국 관리는 “이 사진이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한 건 바로 그러한 검색이었는데 말이다.”

-극비문서인 체로키 파일을 어떻게 입수하고 조사할 수 있었나?

“89년 국회 광주특위에 미국 정부가 보낸 백서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특전사 투입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특전사 부대는 대북 작전을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미군에 상의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다. 미 국무부와 정보기관 등을 접촉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3,000건이 훨씬 넘는 파일을 분석했다. 물론 미국이 ‘사전 승인’을 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도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한국군이 주한미군 지휘관들에게 ‘만일의 학생 데모에 대처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이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전해왔다고 워싱턴에 보고했으나 미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신군부는 이것을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미국이 왜 그런 입장을 취했을까?

“당시 미국은 ‘제2의 이란’을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시끄럽지 않고 안정적인 사회와 그로 인한 원자력 기술 수출 등 경제적 이득을 원했다. 한국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한국은 단 한 번도 미국의 정치외교적 판단에서 독립변수였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주변국과의 큰 그림 속에서 일부였을 따름이다. 기밀 문서와 외교 문서를 보면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 요구에 대해 계속 ‘인내심을 가지라’는 입장이었다. 역겨운 표현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중국과의 긴장 상황 속에서 일본의 아베 총리가 아무리 과거사를 부정하더라도 한국에게 ‘친하게 지내라’고 하지 않나?”

-미국에선 정보기관 분야의 전문 탐사기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정보기관 업무의 외주화를 다룬 ‘Spies for Hire’라는 책도 냈다.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라크전 당시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끔찍한 포로 학대가 보도된 후였다. 당시 그 수용소는 미국 정부나 정보기관이 아닌 그들과 계약한 민간군사기관이었다. 정보기관이나 국방부 등이 민간업체(contractors)에 그러한 업무를 맡긴다는 사실을 알고 취재를 시작했는데, 외주 규모는 무려 전체 정보업무의 70%에 이른다. 이는 미 국방부 정보국(DIA)의 공식 통계다. 오바마는 아프간에 더 이상 미군 병사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외주를 받은 회사에 고용된 사람들은 아직도 거기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지만 정보기관 취재는 굉장히 어려운데.

“물론 어렵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정보기관에 직접 취재하기는 쉽지 않지만 위탁을 받은 민간기업 중에는 상장사도 있다. 그런 회사는 주주들을 위해 연례보고서를 내고 재무상태에 대한 보고서도 낸다. 그런 보고서들을 샅샅이 뒤지고 투자자를 위한 설명회에 투자자인 것처럼 위장해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곳에 근무하는 친구와 함께 건물 내부를 둘러본 적도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장치들도 일부 있다. 정보기관 취재 시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내부고발자의 증언이 결정적이다. 문제는 이들에 대해 가혹한 처벌이 내려진다는 것이다. 고문을 폭로한 사람은 감옥에 가고 정작 고문을 지시한 사람은 멀쩡한 일이 벌어진다. 이는 정권을 가리지 않는다. 오바마 정부에서 기밀을 유출한 죄로 고발당한 내부고발자들의 수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다.”

-항상 엄청난 양의 파일을 모으고 분석한다. 혹시 파일로 가득찬 방이 있나?

“실제로 있다. 현재 파일상자가 큰 상자로 75개 정도 있고, 그중 35개가 체로키를 비롯한 한국 관련 파일이다. 평소에도 자료를 항상 모으고 분류한다. 내 보도의 원천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인권 저널리스트’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80년대 초 광주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꼭 알려달라”고 애원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닥친 뉴올리언스에 갔을 때도 사람들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이 사실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기사를 쓰는 것이 내가 하고픈 일이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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