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 총리는 지난해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 이사회 기조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학술연구에 깊이 천착하기 보다 좀 더 사회의 ‘니드’에 충실한, 더 실천적인 직업교육을 추구해 나갔으면 한다. 그런 새로운 틀이 고등교육과정에 정착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를 전후해 아베 정권 아래 일본에서 이른바 ‘대학의 위기’가 가속되고 있다. 대학을 국가가 목표로 하는 ‘최고 수준의 고도한 프로페셔널 인재’ 양성기관으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대학 바깥의 언어로 하면 ‘대학의 혁신’이고, 대학 내 언어로 말하면 ‘대학의 위기’다.
제2차 대전 전 ‘전체주의’ 혹은 ‘국가주의’ 체제에서 일본의 대학은 전쟁 수행에 유효한 인재 공급의 후방지원체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 무렵 사용된 개념이 ‘군학(軍學)협동’ 혹은 ‘산학(産學)협동’의 개념이다. 그러나 패전 후 일본은 급속한 변화를 경험했다. 미국의 간여도 있었지만 일본 내부의 각성과 변혁의지도 컸다. 특히 대학은 종래의 국가예속에서 벗어나 자율, 자치로 방향을 설정했다. 이때부터 일본의 대학은 근대 이후 오랜 국가 종속이 무색할 정도로 자유와 자율성 그리고 자치 체계를 확립해 왔다.
국가와 대학 간의 외적 관계뿐만 아니라 대학 내에서도 학생이나 교수 개인 그리고 각 분야별 교수공동체의 의사가 최대한 존중되는 학내 민주주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대학의 인사, 커리큐럼을 비롯한 교육 내용, 심지어 각 대학이 지향할 목표 설정에서 개인과 소수집단의 의사가 반영되는 체제를 구축해 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본의 대학은 새로운 국가주의의 공격을 받고 있다. 그 배경에는 ‘신자유주의’가 있다고도 볼 수 있고, 아베 정권 이후 ‘신국가주의’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일본에서는 국가가 다시 가치와 목표를 스스로 만들고 모든 구성원에 이를 강요하는 조짐이 역력해지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경제 발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업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경쟁, 효율, 성과 중심으로 사회 전체가 내몰리고 있다. 대학이 지닌 근원적 가치라든가 정의나 균등, 소수자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헌신짝이 될 위기에 다가서고 있다. 이런 흐름은 대학 내 ‘거버넌스’(governance)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해 효율을 명목으로 한 하향식 의사결정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10여 년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뒤 지금 일본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 필자가 볼 때 한국의 상황은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열악해 보인다. 구조조정으로 치닫는 한국의 대학들에도 국가 주도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고, 효율성을 앞세워 경제논리에 함몰된 기업 중심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강력하게 기능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어떤 다른 가치로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라는 느낌도 든다. 더욱 우려할 것은 이미 한국의 대학이 스스로 구축한 경제논리와 효율성 명분에 사로잡혀 대학의 자유와 이상을 논하고, 그것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막아낼 의지조차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점이다.
대학은 가치를 창출하는 곳이다. 그곳의 인재들이 생산해낸 근원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국가는 나라를 경영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목표를 수립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순서다. 국가나 기업이 만든 효율적 가치에 대학이 역으로 추종하고 거기에 종사하는 것은 대학 자체의 존재의의를 재고해야 할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한일의 대학이 이런 나락의 길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서정민 일본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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