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의 아픔이 서린 일본 규슈의 근대 산업시설들을 그런 과거사 언급 없이 무더기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일본 정부의 방침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첫 협의가 아무런 의견 접근 없이 끝났다. 예상했던 대로다.
2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협의에서 우리측은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형태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위해 등재 결정문에 강제징용 내용을 적시하거나 강제징용 표지석을 설치하는 등의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당초 이 산업시설들의 등재 자체에 반대하던 입장에서는 상당히 뒤로 물러난 제안이다.
우리측 대표인 최종문 유네스코 협력대표는 “등재를 저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우리 우려를 어떻게 다룰지를 놓고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일본측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상 기간을 강제합병이 있었던 1910년 이전으로 한정했기 때문에 한국이 지적하는 강제징용 문제와는 시기가 다른 사안이라는 자세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이달 초 유네스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내린 ‘등재권고’ 결정이 그대로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한 술 더 떠서“정치적 주장을 들고 올 일이 아니다”며 우리측을 비난했다.
강제징용의 역사적 사실을 숨김없이 명시하라는 것은 우리 정부만의 주장이 아니다. 지난 15일 ICOMOS는 “각 장소에 대한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라”는 권고안을 일본 정부에 전달하면서 2017년 11월까지 결과를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등재 여부에 대한 사실상의 결정 권한이 있는 ICOMOS도 시기를 앞세워 역사를 부정하려는 일본의 꼼수에 제동을 건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정치적 주장” 운운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지난 200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독일 에센의 촐페어라인 탄광 산업단지는 세계대전 중 강제노역에 이용됐다는 점에서 일본이 등재하려는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과 흡사하지만, 등재과정은 크게 달랐다. 독일 정부는 부끄러운 사실을 적극 공개하고 정부 차원에서 추모시설까지 건립했다. 이 때문에 등재 신청에 아무런 반발이 없었고, 등재 결정도 표결 없이 만장일치로 이뤄졌다. 이에 비추면 과거를 숨기기 위해 강제징용의 한이 서린 7개 시설을 전체 23개 시설에 끼워 물타기를 시도하고,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로 기간을 한정한 일본의 잔꾀가 더욱 두드러진다.
등재 여부가 최종 결정될 다음달 말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일본 정부가 국제적 상식에 눈 떠서 더 이상 역사에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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