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권운동의 정서적 토대 하이랜더 포크스쿨 음악감독 돼
美 남부 흑백분리에 저항하는 등 사회 이슈 다루는 포크음악 주도
We shall overcome 편곡
1940년대 파업 현장서 불린 곡, 다시 수정해 현재 버전 완성
세계 편견과 불의에 맞선 곡…20세기 가장 중요한 美노래' 선정
미국 36대 대통령 린든 존슨(1908~1973)은 박하게 평가된 정치인이었다. 존 F. 케네디 정부의 부통령이던 그는 1963년 케네디 암살로 직을 승계한 뒤 이듬해 선거에서 당선됐지만 임기 내내 전임자의 눈부신 잔광과 베트남전쟁 부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반전운동이 격해졌던 임기 말은 특히 모질었고, 그는 재선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교육 주택 교통 환경 이민 정책 등 내정에서 보인 그의 역량과 정치철학은 꽤 근사했다. 남부 텍사스 출신이면서 64년 흑인 참정권을 보장하는 민권법안을 발의하고 의회를 설득한 것도 그였다.
65년 3월 15일 그는 법안 통과를 설득하는 의회 연설에서, 인종 차별은 “흑인의 문제도 남부의 문제도 아닌 미국의 문제”이며 “지금 우리는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이 아니라 미국 국민으로서, 미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우리의 싸움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셀마의 일은 우리 사회, 그리고 미 합중국의 모든 지역에 미칠 거대한 운동의 일부였다. 그것은 미국의 흑인들이 미국 국민으로서 삶의 온전한 축복을 누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들의 명분은 바로 우리의 명분이어야 한다. 모든 편견과 불의의 유산을 극복해야 할 주체는 흑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And We shall overcome).”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셀마-몽고메리 행진은 존슨의 연설 일주일 여 전인 3월 7일 시작됐다. 앨라배마 주 흑인 500여 명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셀마 시에서 주 의회가 있던 몽고메리 시까지 평화행진에 나섰고, 백인 경찰은 에그먼드퍼터스 다리를 건너려던 시위대를 곤봉과 최루가스로 저지했다. 이틀 뒤 마틴 루터 킹 주도로 2,500여 명이 벌인 2차행진 역시 유혈 진압됐다. 당시 시위대가 부른 노래가 ‘We shall overcome’이었고, 존슨의 연설은 그 노래의 화답이었다.
60년이 흐른 지난 3월 7일 ‘피의 일요일’ 기념행사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시민들과 함께 에그먼드피터스 다리를 건너며 저 노래를 합창했다. 그들의 노래는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서 나아가, 존슨의 연설처럼,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환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편견과 불의에 맞선 싸움 현장에서 언제나 불리고 또 불리어질 노래 ‘We shall overcome’을 지금의 리듬과 멜로디로 다듬고 또 널리 알린 포크 뮤지션 가이 캐러원(Guy Carawan)이 5월 2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대중음악에서 포크와 컨트리는 노래의 메시지가 사회적이냐 개인적이냐로도 나뉜다. 컨트리음악이 개인의 서정이나 풍경을 주로 노래한다면 포크음악은 정치ㆍ사회적 이슈와 서민의 삶의 현실에 천착한다. 1940~60년대 미국 포크 음악운동을 선도한 우디 거스리, 피터 시거 등은 가수이자 운동가였다. 그들은 전국을 떠돌며 구전 민속음악을 수집하고 자유와 저항의 노래를 만들어 전파하며 50~60년대 민권운동의 정서적 토대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그들 중에 가이 캐러원이 있었다.
캐러원은 1959년 포크음악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이랜더 포크스쿨(Highlander Folk School, 현재는 하이랜더 연구교육센터)’ 음악감독을 맡는다. 인권운동가와 교육자 성직자 등이 1932년 테네시 주에 세운 ‘스쿨’은 노동 인권 활동가 양성 기관이자 문화적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취임할 즈음의 현안은 남부 흑백분리 정책 및 관습에 대한 저항이었다. 60년 2월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시의 흑인 대학생 4명이 주도한 백인전용식당(울워스 식당)의 좌석 점거(sit-in)운동도 그 중 하나였다. ‘스쿨’ 청년 워크숍을 이끌던 캐러원은 4월 15일 노스캐롤라이나 쇼(Shaw) 대학에서 열린 ‘학생비폭력조직위원회(SNCC) 출범식에 초대된다.
그는 행사 막바지에 단상에 올라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 한 곡을 부른다. 낯익은 듯 새로운 가락. 쉽고 장중하지만 가라앉지 않는 리듬과 박자. 그리고 좌절의 순간에도 승리를 예감하게 하는 기품어린 노랫말. ‘We shall overcome’이었다. 200여 명의 학생 대표단은 즉석에서 노래를 익혀 제창한다. 그렇게 익힌 그들의 노래는 미국 전역의 투쟁 현장으로 바람처럼 퍼져갔고, 3년 뒤인 63년 8월에는 워싱턴 링컨기념관 광장의 군중 30만 명이 포크 가수 존 바에즈와 함께 합창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We shall overcome’을 미국의 ‘라 마르세예즈’라고 썼다.
‘We shall overcome’의 뿌리를 단정짓기는 힘들다. 뉴욕타임스는 멜로디의 원조를 18세기부터 불린 가톨릭성가 ‘O Sanctissima(Blessed Virgin Mary)라 썼다. 30년대 흑인 침례교 성가대 감독이던 루이스 셔럽셔라는 이의 찬송가 ‘If My Jesus Wills’라는 설도 있다(위키피디아). 가사는 흑인 감리교 목사 찰스 알버트 틴들리의 1901년 찬송가 ‘I will Overcome Someday’와 아주 유사하지만, 구약 갈라디아서 6장 9절(Let us not be weary in doing good, for in due season we shall reap, If we faint not)에서 연원을 찾는 이들도 있다.
그 두 갈래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가 어떤 연유로 결합했는지, 역시 정설은 없다. 다만 40년대 즈음 ‘I will overcome(또는 I’ll be All Right)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노래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45년 가을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의 한 담배회사(아메리칸 토바코 컴퍼니) 노동자들이 5개월여의 파업 기간 중 하루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저 노래를 불렀고, 당시 ‘미국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식품ㆍ담배노조’ 간부였던 질피아 호턴(Zilphia Horton)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호턴은 남편 마일스 호턴과 함께 하이랜더 포크스쿨을 열고 음악감독을 맡았던 바로 그였다. 그가 친구였던 피터 시거에게 노래를 소개했고, 시거는 45년 뉴욕서 만든 포크운동 그룹 ‘People’s Song’의 48년 9월 회보(포크송 불리틴)에 악보를 싣는다. 시거는 호턴 버전에서 가사 일부(I→We, will→shall)를 바꾸고 또 일부 가사를 추가했다. 56년 호턴이 사고로 숨지면서 공석이 된 ‘스쿨’ 음악감독 자리에 취임한 캐러원은 시거 버전의 박자를 또 한 번 수정해 가장 보편적으로 불리는 현재 버전을 완성했다. ‘We shall overcome’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구전으로 진화했고 50~60년대 포커뮤지션들의 재능과 열정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후로도 쉼 없이 진화하고 있다.
캐러원은 노래에 자신이 기여한 바는 보잘 것 없다고 했다. 1999년 NPR 인터뷰에서 “모든 걸 고려할 때,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아카펠라 스타일에 능숙했던 SNCC의 젊은 노래꾼들이 그 노래를 더 아름답게 꾸미고 널리 알린 일등공신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목소리로 변주했고 선율에 화음을 얹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터 시거를 비롯한 당대의 포커 싱어들은 그 공을 모두 그에게 돌렸다.
가이 캐러원은 1927년 7월28일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석면 도급업자(석면증으로 사망)였고, 어머니는 무명 시인이었다. 로스엔젤레스 옥시덴탈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UCLA에서 사회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음악과 사회, 특히 민속 음악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큰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그는 노래를 잘했고, 클라리넷과 우쿨렐레 벤조 덜시머 등 연주에도 능했다.
UCLA 지도 교수였던 민속학자 웨이랜드 핸드(Wayland Hand, 1907~1986)는 포크 음악을 통해 사회 변혁에 기여하고자 했던 캐러원의 시도를 께름칙해했다고 한다. 2차 대전 직후였고, 나치의 편향적 민속ㆍ전통 탐구와 선민적ㆍ낭만주의적 문화 선전의 폐해가 문화 지식인들의 정서를 짓누르던 때였다. 나치 문화장관 괴벨스가 33년 ‘제국문화협회 창립문’에서 “독일 음악”은 “낭만적이고 비밀스러운 운명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영적 영역에서 투쟁적 행동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망명 음악, 나치음악 145쪽, 이경분 지음, 책세상)한 이래 나치에게 음악은 독일인의 감정을 사로잡고 선동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캐러원은 음악의 ‘역설적 힘’을 더 신뢰했던 듯하다. 나치가 아리안의 우월적 상징으로 동원하곤 했던 베토벤, 특히 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에서 6,000여 명이 합창한 교향곡 9번(합창)의 ‘환희의 송가’가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에게는 자유의 이상을 상징하는 노래였다는 아이러니, 또 게토와 나치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심지어 가스실 안에서도 그 축제의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 캐러원은 그 노래의 힘을 믿었던 듯하다.
졸업 후인 50년 무렵 그는 포크 음악운동의 거점이던 뉴욕 그리니치빌리지로 진출, 당대의 주역들- 피터 시거, 프랭크 해밀턴, 잭 엘리어트 등-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미국 전역, 특히 남부지역을 돌며 민담과 포크 음악을 수집하고, 새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또 수집된 자유의 노래와 민담을 토대로 가사와 곡을 편곡하고 레코딩하고 프로듀싱하고 전파하는 일. ‘Follow the Drinking Gourd’ ‘Keep Your Eyes on the Prize’ ‘Hold On’ “I’m Going to Sit at the Welcome Table’ 등이 그 일부였다. 하이랜더 포크스쿨을 처음 방문한 것도 그 무렵인 53년이었다. 영국 등 해외로도 다녔다. 57년 구소련의 청년학생 세계축전에도 참가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해 미국 여권이 취소되기도 했고 구금도 4차례나 당했다.
59년 ‘스쿨’ 음악감독이 된 뒤로도 그 작업은 이어졌다. 그는 30여 장의 앨범을 만들었고, 수많은 녹음작업을 주도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씨아일랜드(sea island)에서 그와 작업한 열네 자녀의 어머니 재니 헌터(당시 71세)는 1984년 미 연방정부 산하 연방예술기금(NEA)의 ‘내셔널 해리티지 펠로십’을 받기도 했다.
그가 두 번째 아내 캔디 앤더슨을 만난 것도 60년 하이랜더에서였다. 캘리포니아 포모나대학 재학생으로 그 무렵 내슈빌 피스크대학 교환학생으로 온 앤더슨은 싯인 운동의 원년 백인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61년 결혼한 둘은 두 아이를 두었고, 교육자로 또 사회운동가로서 각자 또 함께 활동하며 해로했다.
그러는 사이 ‘We Shall Overcome’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불렸다. 68년 북아일랜드 시민권운동의 주제가이자 슬로건이 ‘We Shall Overcome’이었다. 남아공 반아파르트헤이트와 89년 체코 벨벳 혁명 현장, 중국 텐안먼과 무너진 베를린 장벽 앞에서도 불렸다. 수많은 가수들도 그 노래를 탐냈고, 그 중에는 락이 본령이라 해야 할 로저 워터스와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있었다.
캐러원은 자신의 버전으로 그 노래를 처음 부른 지 30주년이던 90년 1월 시카고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89년 프라하와 베이징, 베를린의 일을 예로 들며 “그 현장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의 한 형식이 아니라 힘든 시기를 관통해가는 이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80년대 한국의 노동자 농민 학생들도 김민기 버전의 ‘우리 승리하리라’에 적지 않은 빚을 졌다. 1999년 NPR(National Public Radio)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미국의 노래 100곡’의 리스트 앞 자리에 ‘We shall overcome’을 놓았다.
미국 저작권법에 따르면 노래의 저작권은 여러 음반사와 호턴 캐러원 피트 시거 등 뮤지션에게 각 50%씩 있다. 뮤지션들의 저작권 수입은 현재 ‘스쿨’이 운영하는 ‘We Shall Overcome’펀드에 적립돼 미국 남부지역 흑인 문화사업에 쓰이고 있다.
2008년 11월 버락 오바마의 제44대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직후 ‘We Have Overcome’이란 플래카드를 든 한 지지자의 사진이 여러 언론에 보도됐다. 이후 수 차례, 그리고 이듬해 1월 20일 마틴 루터 킹의 날(1월 셋째 월요일) 추모 행사장에도 저 문구의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후로 여러 차례 린든 존슨의 65년 연설, 즉 편견과 불의에 맞선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곱씹었을 것이다. 정의와 인권의 궁극적 승리(overcome)는 늘 의지의 조동사(shall)를 앞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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