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창조적인 작업들은 항상 이질적이고 역동적인 경계에서 탄생해왔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음악은 항시 주변 예술들과의 결합을 꾸준히 시도해왔고, 이를 통해 조금 더 높은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음악의 주요한 예술적 동지로 영화를 꼽는 건, 이제는 상식 퀴즈의 초반 단계에나 나올 평범한 문제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장르 간의 접속이 우점종인 한 장르에 의한 다른 장르의 흡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장르의 자율성이 보존되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영화 언어뿐만 아니라 음악 선곡에 있어서도 자율성을 확보한 세 편의 영화들을 골라봤다.
● '트와일라잇' 시리즈 ? ‘수학의 정석이 아닌 선곡의 정석’
이 시리즈에 삽입된 음악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알렉산드라 팟사바스(Alexandra Patsavas)라는 이름을 머릿 속에 입력해야 한다. 알렉산드라 팟사바스는 바로 <트와일라잇> 연작의 선곡을 담당한, 할리우드의 뮤직 수퍼바이저(음악 감독). 68년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록 음악에 심취한 그는 각종 뮤직 에이전시의 직원으로 일하며 뛰어난 선곡감각을 발휘, 결국 할리우드의 넘버원 음악 감독으로 우뚝 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지금도 수많은 뮤지션의 매니저들이 알렉산드라 팟사바스에게 음원을 보내고 제발 들어봐 달라고 애원을 보낸다고 한다. 그는 하루에 수백 장의 씨디를 듣는다고 하는데,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 있다. "도입부 30초만 들어보면, (지금 작업하고 있는 영화에 필요한 곡인지 아닌지) 감이 오거든요." 이런 자신감에 걸맞게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수놓는 레퍼토리들은 영화의 스토리와 분위기 모두에 걸맞는 선곡들로 채워져 있다. 가히 수학의 정석 아닌, ‘선곡의 정석’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 ‘음악 마니아의, 음악 마니아에 의한, 음악 마니아를 위한’
이 영화의 원제는 ‘하이 피델리티(Hi-Fidelity)’다. 우리가 보통 ‘하이-파이’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기실 소설이다. 닉 혼비(Nick Hornby)라는 영국 작가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화가 된 것인데, 다음과 같은 정보를 먼저 알고 보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이다. 닉 혼비가 소위 말하는 ‘음악 덕후’라는 것, 비교하자면 영국의 ‘무라카미 하루키’ 비슷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스토리 역시 ‘음악 마니아’들의 일상을 스케치하는데 집중한다. 그런데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요컨대, 과거 대부분의 영화들이 음악이 영화에 ‘삽입’되었다면, 이 영화는 음악이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스토리는 솔직히 별 거 없다. 음악력에 있어서만큼은 ‘쫀심’ 센 그들이 대체 사랑에는 왜 매번 서투르고 실패하는지를 묻고 있는 게 전부다. 이 지점에서 배우 잭 블랙(Jack Black)의 덕후 연기는 가히 인류 역사상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과연, “덕은 역시 양덕이 최고”라는 잠언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던 게다. 그는 영화를 통해 주인공을 맡은 존 쿠삭(John Cusack)보다 더 큰 화제를 모으면서 ‘신 스틸러’급 이상의 활약을 보여줬다. 또한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찌질하게 보일 수도 있을 음(악)덕(후)의 세계를 유머러스하게 묘파하면서 ‘음악을 잘 몰라도 낄낄대며 볼 수 있다’는 장점을 일궈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게 모두 저 위대하신 잭 블랙님 덕분이라는 걸 기억하자.
● '굿 윌 헌팅' - ‘어머니의 이름으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라는 뮤지션이 맡았다. 하버드 대학교를 나오셨으며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훈남으로 거론되는 주연 배우 맷 데이먼(Matt Damon)과 2014년 세상을 떠난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 등의 화려한 캐스팅에 비하면, 확실히 ‘뭥미?’ 싶은 이름이다.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이 이 영화의 감독인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다. 그는 주로 아트 필름 쪽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어온 것으로 유명한데, 거의 유일하게 ‘대중성이 있는’ 영화 하나 만든 게 있다. 바로 이 작품 <굿 윌 헌팅>이다. 구스 반 산트는 영화음악을 무조건 엘리엇 스미스에게 부탁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추구하는 분위기와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이 잘 어울릴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엘리엇 스미스가 이 거대한 떡밥을 떡하니 거절한 것이다. 완고했던 엘리엇 스미스의 고집을 꺾은 건, 놀랍게도 그의 어머니였다. 엘리엇 스미스의 어머니가 어떤 모임에 가서 “우리 아들 음악해요”라고 했는데,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아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순서는 예상 그대로다. ‘어머니를 위해’ 음악 작업에 참여하기로 한 엘리엇 스미스는 이 영화를 통해 필생의 걸작을 하나 발표하게 된다. 바로 영화의 라스트 신에 흘러나오는 ‘Miss Misery’다. 게다가 그는 이 음악으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되어 시상식에서 공연까지 하는 영광도 누렸다. 이렇듯 엘리엇 스미스 인생 역전 스토리의 실질적인 주역, 그것은 다름 아닌 ‘깊은 효심’이었다.
음악평론가 겸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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