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분노였다. 당황스러웠으나 공감했다. 오랜 만에 뵌 집안 어른은 요즘 방송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다. “채널을 돌리면 수다 떠는 저질 프로그램만 보인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시청료를 내지 않겠다”며 구체적인 ‘실력행사’ 의지도 드러냈다. “시청료는 KBS와 EBS에만 쓰인다”고 슬쩍 말했으나 “KBS도 마찬가지”라는 반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방송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는 어른의 한탄에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요즘 국내 방송은 ‘방종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방송 공공성 실종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해도 과하지 않다. 최근 개그맨 그룹 ‘옹달샘’(장동민 유세윤 유상무)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방송 생태계의 급속한 붕괴가 ‘옹달샘 사건’을 만들고 옹달샘을 살아남도록 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 KBS 사장에 정연주 한겨레신문 논설주간이 임명됐을 때 야당이던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이 나왔다. “신문기자 출신이 공영방송의 수장 역할을 할 수 있느냐”가 공식적인 비판의 요지였다. 정작 정권이 바뀌자 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동아일보 출신의 최시중씨가 방송과 통신 정책을 관장하는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방송 정책이 제대로 세워질 리 없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혔던 최 위원장은 속전속결로 종합방송채널 4곳을 출범시켰다. 국내 방송 시장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결정했어야 할 방송 정책이 졸속으로 이뤄졌다. 종편의 등장이 지상파 방송의 횡포를 막고 새로운 방송 구조를 만들 것이라는 당초의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좁아터진 방송시장에 4곳이나 허가를 내주다 보니 방송 생태계는 혼돈에 빠졌다. 광고시장을 두고 약탈적인 싸움이 펼쳐지고 있다. 방송광고총량제가 도입되고 간접광고도 확대되고 있다. 시청자만 피해자다.
현 정권에서도 올바른 방송정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최성준 방통위 위원장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정통 법조인이다. 정연주 전 사장과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이 그나마 언론이라는 느슨한 끈으로 방송과 묶여있었던 것과 비교된다. 방송국 고위간부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꼴이라면 지나친 비약일 까. 방송 전문성과 거리가 먼 인사에게 제대로 방송 질서의 확립을 바랄 수 없다.
모든 방송의, 모든 방송에 대한 투쟁의 시대가 되면서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의 경계는 무너졌다. 상업방송은 더욱 선정적인 프로그램 내보내기에 몰두하고 공영방송은 살아남기 위해 못이기는 척 상업방송의 행보를 따른다. ‘옹달샘’은 이런 방송환경 급변의 혜택을 봤다.
얼마 전만 해도 국내 방송은 물의를 일으킨 방송인에게 엄한 조치를 내리곤 했다. 2011년 강호동은 세금 탈루 의혹이 불거지자 ‘잠정 은퇴’라는 모순적인 조어를 만들며 방송으로부터 물러났다. 성난 시청자들의 항의와 반발을 이겨낼 수 없던 방송 환경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옹달샘’은 버티기에 성공했다. 한 종편 채널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여러 방송들이 ‘옹달샘’을 바로 내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방송국은 많고 만들어야 할 프로그램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시청률에 기댄 생존 싸움이 예전보다 치열해진 상황에서 세 명이 한 묶음이라 할 ‘옹달샘’의 구성원 중 하나라도 먼저 내보낼, 용감한 방송 제작진은 거의 없다.
모든 방송은 공공성을 띄어야 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특히 종편은 공공성에 민감해야 한다. 의무전송(다른 케이블채널과 달리 케이블TV나 IPTV 가입자에게 정해진 채널로 무조건 방송이 전송되는 제도)의 혜택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선정성 높은 종편 방송들을 보다 보면 의무전송은 분명 특혜다. ‘옹달샘’만을 향해 손가락질 해서 무엇하랴. 방송 공공성은 이미 단어로만 남아 있는 게 현실인데.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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