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들녘이 하늘과 맞닿아
한반도 유일한 '지평선 뷰' 자랑
백성들 먹여 살린 풍요의 들판
일제 수탈 눈물이 배인 땅이기도
고대의 4대 인공저수지 벽골제
가장 긴 역사와 큰 규모 뽐내
오천년 이어 온 농경문화 상징
김제시,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박물관 단지·조정래 아리랑문학관
학생·가족 단위 체험객들로 북적
최신 정보통신기술 접목시켜
미래형 농경문화 센터로 도약 채비
산과 구릉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사방으로 탁 트인 넓은 들을 만나기 쉽지 않다. 대부분의 풍경 속 들판을 훑는 시선은 그 들을 감싼 산자락에서 멈춰서고 만다.
우리 땅에서 하늘과 땅이 맞닿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있다. 바로 전북 김제다. 김제로 들어서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끝없이 펼쳐진 너른 들녘이 눈을 가득 채운다. 마치 거대한 다리미로 팽팽하게 다려놓은 듯하다. 북쪽의 만경강과 남서쪽의 동진강 사이에 광활하고 풍요로운 금만(김제만경의 줄임 말)평야를 품고 있는 김제는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다. 김제 시내를 지나 망해사를 향하면 진봉면과 광활면의 김제평야가 얼마나 너른지 실감하게 된다. 들판이 오죽 광활했으면 행정명 마저 광활면이겠는가.
조정래 작가는 대하소설 ‘아리랑’에서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광활한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제자리에서 헛걸음 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게 외배미들’이라고 불렸다. 이곳이 김제 만경평야이며 호남평야의 한 축이다. 호남평야 안에서도 김제 만경 벌은 특히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여서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는 곳이다’라고 묘사했다.
김제는 삼한시대에 벽비리국,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으로 불렸다. 벼의 고을이란 뜻이다. 벽골은 통일신라 때 지명을 한자로 고치면서 ‘금의 언덕’ 또는 ‘황금의 벌판’이란 현재의 김제로 바뀌었다. 김제는 지명처럼 들판으로 둘러져 있다. 용지들, 부용들, 동계들, 백구들, 저산들, 청하들, 만경들과 같은 너른 들을 비롯해 봉산들, 봉남들, 월촌들, 남포들, 돔배들이 있다. 이곳이 김제평야다. 이 넓고 풍족한 들판에서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도 했고 한 때는 가진 자와 일본의 수탈 대상이 된 설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제역에서 29번 국도를 따라 남서쪽으로 8km쯤 내려가면 넓은 들판의 오랜 농경문화가 배어 있는 우리나라 고대 저수지인 벽골제를 만난다. 벽골제는 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부족했을 때 사용하던 대표적인 인공저수지다.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 상주 공검지와 함께 우리나라 4대 수리시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됐다.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에 걸쳐 2.5㎞에 이르는 제방이 현존해 있다. 1700년 전 삼국시대 백제에서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통일신라와 고려 때 고쳐 쌓은 후 조선시대에 보강했으나 세종 때 폭우로 유실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논으로 바뀌며 작은 하천만 남아 옛 저수지의 풍광은 사라졌다. 지금의 시설 대부분은 근래 들어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발달된 토목·건축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벽골제 사적지 안에는 당시 설치했던 5개의 수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장생거와 남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에 경장거가 남아있다. 제방 쌓는 데만 연인원 32만명이 동원될 만큼 당시 축조공사는 거대한 국가사업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벽골제는 1963년 1월 제방과 벽골제 중수비, 신용리 일대 30만3,843㎡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이 이뤄졌고 2018년까지 발굴이 예정돼 있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중심거로 추정되는 수문의 구조와 제방 쌓는 과정을 확인했다. 제방 아래 초낭(草囊:흙을 채운 풀 주머니)구조와 들것형 목제품이 출토됐다. 김제시는 오천년 농경문화의 상징으로서 벽골제 가치를 드러내고 쌀 문명권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세계문화유산등재 추진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벽골제 주변은 전통 농경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20여만㎡ 규모의 박물관복합단지가 조성돼 있다. 농경의 역사, 농경도구, 농경사회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농경문화 박물관을 비롯해 벽천 미술관, 농경사주제관 및 체험관, 전통가옥 체험마을 등 고대 농경사회를 엿볼 수 있는 시설이 즐비하다. 요즘 학생들에게는 농경생활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최근 학교와 가족단위 체험객들의 방문이 늘고 있다.
농경사주제관 앞마당에 마련된 민속놀이 참여체험장은 선비문화와 짚풀공예, 목공예, 두부 만들기, 다도, 압화(꽃누름) 등 상설체험이 운영돼 나들이 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벽골제 단지 건너편에는 국립 김제 청소년 농업생명체험센터가 들어서 체험과 숙박, 연수를 동시에 할 수 있게 됐다. 국가에서 건립한 국내 유일의 농생명과학 체험활동 청소년수련시설로 연간 5만명이 다녀간다.
체험센터 바로 옆에는 조정래 아리랑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소설 ‘아리랑’은 김제 들녘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의 수난과 투쟁의 현장들을 담아낸 작품이다. 문학관에는 10여년의 집필 과정이 빼곡하게 정리된 취재수첩과 자료노트, 취재 중 사용한 일용품이 전시돼 있다. 육필원고와 방대한 자료조사 흔적은 한 페이지 한 장면을 써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다. 제3전시실에는 가족사진을 비롯해 애장품, 신문기사들, 앨범, 필기구, 아내에게 선물했던 펜화 등 주변생활 소품이 전시돼 작가의 채취와 정신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아리랑문학관에서 시내 방향으로 자동차로 5분쯤 달리면 ‘아리랑’ 주인공들의 터전이었던 죽산면 홍산리 내촌·외리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이 ‘아리랑’ 배경을 재현한 아리랑문학마을이다. 홍보관을 비롯해 근대수탈기관인 주재소, 우체국, 정미소, 면사무소와 이민자 가옥, 하얼빈역 등을 재현해 놓았다. 10월이면 지평선축제와 더불어 이곳에서 아리랑축제가 열린다. 아이들과 함께 가면 역사공부도 되고 민족의 자존감을 느끼고 경험을 할 수 있을 듯하다.
넓디넓은 지평선을 가진 김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벽골제가 만들어질 만큼 농경문화를 주도했지만 생명과도 같은 양식을 강탈당했던 아픔과 고통을 가진 땅이었다. 이제는 세계 최장의 새만금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또 다른 미래의 땅으로 변모하고 있다. 아직 조성은 끝나지 않았지만 금만(만경·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새만금의 시대를 기다리고 있다. 이와 함께 노후관광지 재생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벽골제를 올해 안에 기존 시설에 놀이와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하는 새로운 농경문화를 선보일 채비를 하고 있다.
김추식 김제시 문화홍보축제실장은 “벽골제 사적 단지를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대표 관광지로 만들겠다”며 “전국 최대의 농경문화 관광지로서 새만금시대 중심 관광지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제=하태민기자 hamo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