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점. 남자들 사이 여자 하나를 일컫는 이 단어는 묘한 설렘을 줍니다. 사실 남성들의 영역인 카레이싱 세계에 발을 들이며 '사랑받는 홍일점'에 대한 기대를 아주 조금은 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참 헛된 생각이었죠.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들었던 기대이기도 했고요.
레이싱의 시작은 카트였습니다. 100cc 야마하 엔진이 장착되어있는 카트로 시작했고, 이후 125cc 로탁스 엔진이 장착된 카트를 몰았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경차가 999cc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참 작고 스피드도 없을 거란 생각도 들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정말 느낌 자체가 다릅니다. 앞유리가 없고 차 무게도 가벼울 뿐더러(운전자를 뺀 무게가 약 80~90kg) 차체가 지면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달리기 때문에, 레이서가 느끼는 속도감은 엄청나거든요. 이같은 스피드에 매료돼 저는 본격적으로 레이싱에 발을 들이게 됐습니다.
레이싱의 세계는 생각과 달리 굉장히 냉혹했습니다. 홍일점이라 더 사랑받긴커녕 편견과의 싸움부터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레이싱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뜻하지 않게 엿듣게 됐습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도중이었죠.
“여자애 쟤 뭐야? 내가 쟤한테 지면 레이싱 그만 둔다”
“뭘 신경쓰냐, 뜨고 싶은가보지. 쟤 저러다 말거야. 신경 쓰지 마”
순간 울컥했습니다. 소리 내 울고싶었고, 당장 뛰쳐나가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기에 한동안 어금니를 꽉 깨물고 숨죽인 채 흐느꼈습니다. 그리곤 눈물을 닦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당신만큼은 꼭 꺾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편견이 생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남이 걷지 않는 길을 걷는 누군가를 바라 볼 때, 보통은 응원보다는 무시나 비난의 시선이 더 많잖아요. 꼭 서킷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그 뒤에도 뒤돌아 눈물 흘린 날이 많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될 수록 오기가 생겼고, 그것은 승부욕으로 승화됐습니다. 안 풀릴때도 변명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오로지 성적만이 편견을 걷어낼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카레이싱 경기는 남녀가 함께 동등한 클래스의 차를 몰고, 같은 서킷을 달려 승부를 내는 경기이기에, 성적만 따라준다면 편견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성적을 내는 과정은 당연히 힘들었습니다. 카레이싱이 운전 실력만 가지고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종목이 아니거든요. ‘여자라서’라는 말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 체력이나 지구력, 담력에서 남성과의 차이가 있는 건 분명했거든요. 그래서 비 시즌 기간에도 혹독한 체력 훈련을 버티고 또 버텨냈습니다.
심각한 부상도 오기로 견뎌냈습니다. 카레이싱은 갈비뼈에 스트레스가 많이 가게 되어있는게 특징입니다. 때문에 갈비뼈 골절 부상도 빈번하죠. 저 역시 한 때 갈비뼈 세 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경기를 포기해야 하는 수준이었지만,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진통 주사를 맞고, 진통제를 삼키며 출전했고, 그 경기에서 2위를 기록, 처음으로 포디움(시상대)에 올랐습니다.
체력과 노하우를 쌓아가다 보니 이제 상위권에도 이름을 올리는 수준이 됐습니다. 자연히 저를 무시했던 남성 드라이버들을 앞서기도 했죠. 성적이 나오니 편견도 차별도 서서히 사라졌고, 제 자신도 더 당당히 서킷을 달릴 수 있게 됐습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저를 무시했던 남성 드라이버들이 오히려 고마운 마음도 듭니다.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도 안주하며 아프면 쉬아가며 그저 그런 여성 레이서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여성 카레이서
● 권봄이를 조명했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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