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학자 김화영 고대교수 딸
프랑스 요리유학 중 기획자로 전환
10년 전 브런치 문화 국내 첫 소개
쇼핑을 레저로 만든 푸드마켓 기획
"내 일은 스토리 만드는 것"
럭셔리 아닌 '일상의 사치' 추구

‘핫하다’는, 이 짧은 영어로만 설명이 가능한 공간들이 있다. 브런치 문화를 이 땅에 처음 상륙시킨 압구정동 라운지 레스토랑 ‘텔 미 어바웃 잇’(2004), 프라이빗 웨딩을 치러도 좋을 만큼 자연친화적인 공간으로 도시인들을 사로잡은 신사동 카페 ‘무이무이’(2009), 부유한 신사들만 입주 가능한 남산의 오피스빌딩 스테이트 타워에 유일하게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됐던 레스토랑 ‘그로브 라운지’(2011), 장보기도 럭셔리의 범주에 포획될 수 있음을 획기적으로 보여준 청담동 ‘SSG 푸드마켓’(2012)….
지난 10여년 간 등장 자체가 사건이었던 핫 플레이스들의 연대기를 작은 역사의 형태로 정리하다 보면 금세 추출되는 공통인자가 있다. F&B 컨설턴트 김아린 ‘비 마이 게스트(Be My Guest)’ 대표다. 이 공간들의 개념을 잡고, 인테리어부터 메뉴 선정, 주방 세팅, 유니폼, 식기, 냅킨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들을 동원해 그 공간의 철학을 구현해내는 작업을 모두 김 대표가 맡았다. 화제가 되는 음식 공간의 기획자를 더듬더듬 찾다 보면 깔때기처럼 한 곳으로 모이는 이름. 그는 현재 누구에게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 나오는 F&B 컨설팅 분야의 가히 독보적인 존재다. 겨우 서른 여덟 나이에.
미술과 요리가 만났을 때
김아린 비 마이 게스트 대표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미술을 했다. 예원학교를 거쳐 이화여대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실은 사진이나 패션을 공부해보고 싶었는데, “그런 건 학문이 아니다. 기초학문을 하지 않으면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며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순수미술을 선택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니?” 물어보면 될 것을 “맹렬히 하고 있나?” 윽박지르듯 몰아쳤던 아버지는 너무 엄하고 무서웠다. 불문학자인 김화영(74) 고려대 명예교수가 바로 그 아버지. 어머니는 국내 1세대 설치미술가인 양주혜(60) 작가다.
“전공에 뜻이 없이 노는 것 같아 보이니까 아버지께서 방학 때 외출금지를 내리셨어요. ‘문화기호학’ 같은 책 10권을 주시면서 다 읽고 독후감과 앞으로의 진로계획을 제출하라고 하시더군요. 꼼짝없이 갇혀서 책만 읽으면서 난 앞으로 뭘 하나, 남보다 잘하는 걸 해야 성공할 텐데, 고민하다 보니 요리라는 답이 나오더라고요. 제가 당시 요리를 잘했거든요. 주입식으로나마 항상 구도를 배우고 살았으니까, 플레이팅 할 때 미적 본능 같은 게 발휘될 수도 있을 것 같았고요.”
지금이야 요리 유학이 매우 흔하지만,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요리를 배우러 외국에 간다는 건 다소 황당한 발상이었다.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가 예상됐다. 그런데 “워낙 먹는 걸 좋아하셔서 그랬는지” 뜻밖에도 흔쾌한 찬성. 뿐만 아니라 ‘제2의 고향’ 프랑스로 몸소 건너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들을 찾아 다니며 식사한 후 ‘이런 식당에서 일하려면 어느 학교를 나와야 하는지’ 일일이 취재까지 해다 주셨다.
“그때 모든 셰프들이 말했던 학교가 바로 페랑디(Ferrandi), 국립프랑스요리학교였어요.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하는 도제식 교육과정 말고는 10년 이상의 직업경력이 있는 셰프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학교였죠. 대학졸업을 경력으로 인정받고 프랑스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힘들게 입학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전 너무 늦게 시작한 거예요. 열여섯 나이에 벌써 주방 경력이 2,3년씩 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미술 할 때 보면 데생을 늦게 시작한 친구들은 잘 못 따라오거든요.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비즈니스를 접목한 연회 기획 및 경영으로 전공을 바꿨죠. 그게 좋은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레스토랑, 일상의 판타지를 위한 플랫폼

프랑스와 미국에서 레스토랑 컨설팅 회사에 다니다 귀국해 자기 회사를 차린 김 대표는 2004년 처음 내놓은, 지금은 사라진 브런치 식당 ‘텔 미 어바웃 잇’이 소위 대박을 치면서 업계에 화제가 됐다. 브런치라는 외래문화가 먹힐 것 같다는 감이 들면서도 “계란 후라이에 베이컨 구워 내놓는 이 음식을 사람들이 과연 돈 주고 먹을까” 반신반의했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레 트로아, 스테이트 타워, SSG 푸드마켓, 신세계 떡방, 아모레 오설록 티스톤 등 이후 12년간 비 마이 게스트의 히트작은 끝없이 이어진다.
“레스토랑은 일상의 판타지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밥은 삼시세끼 먹잖아요. 어쩌다 한번 있는 크고 사치스런 이벤트보다는 매일 먹는 끼니 중 한 번쯤은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나 자신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거죠. 그 플랫폼이 식당 아닐까요?”

김 대표는 “F&B 컨설팅이 연예기획사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식당이라는 스타를 열심히 준비해서 짠 내보내고 키우는 거죠. 인테리어, 로고, 디자인부터 어떤 메뉴를 내놓을 것인가, 주방 셋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다 중요하지만, 기본은 브랜딩이에요.”
그가 키운 수많은 스타 중 가장 애착과 보람을 느끼는 것은 SSG 푸드마켓. 학창시절부터 학교 앞 슈퍼와 문구점에서 각종 젤리와 말린 문어다리와 호돌이 지우개 찾아내는 일에 탐닉해온 터라 슈퍼마켓이라는 주제에 홀딱 빠졌다. “내 본분에 맞게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상점이 주는 각별한 재미가 있잖아요. 그건 샤넬백으로는 얻을 수 없는 기쁨이고, 그런 일상의 기쁨이 곧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와 아빠가 함께 놀며 장을 보는 모습이 SSG 푸드마켓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워요. 일상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쇼핑을 하나의 레저활동으로 만들었다는 데 보람을 느껴요.”
넥스트 럭셔리는 가족과 함께하는 삶
핫 플레이스를 만들어내는 감각이란 시대의 욕망을 읽어내는 예민한 촉수에서 나오는 것이고, 우리 시대에 그 촉수는 매우 빈번하게 ‘럭셔리’를 더듬는다. 특별하지만 일회적인 사치 대신 ‘일상의 사치’가 중요해졌고, 그 덕분에 럭셔리한 레스토랑은 문화적 의미가 충만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그런 럭셔리한 감각은 어떻게 유지하는 걸까.
김아린 대표는 “정확하게 타깃을 이해하고, 그 타깃에 맞는 솔루션을 내놓을 뿐”이라고 답했다. 목이 타는 사람 앞에 시원한 물을 내놓으면 못 팔 리가 없다. 그 사람이 목이 마른지, 안 마른지를 알게 되는 과정이 중요할 뿐. 하이엔드 소비자가 어느 정도는 고정돼 있지만, 누구라도 몇 번쯤은 목이 마르게 돼 있다.
“제가 하는 일은 실패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막아 적정선의 성공을 안전하게 이뤄드리는 거예요. ‘무조건 성공시켜 드리겠습니다’ ‘대박나게 해드리겠습니다’가 아니에요. 중요한 건 감성입니다.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닌 물건이어도 그 안의 스토리가 날 간질이면 사고 싶어지잖아요. 그런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게 제가 하는 일이죠. 꼭 럭셔리로 국한할 건 아니에요.”
김 대표는 SSG 슈퍼마켓을 준비하면서 소위 말하는 트렌드 리더들을 심층 인터뷰한 적이 있다. 유명 회사 사장, 디자이너 등 우리 사회의 하이엔드 소비자들이다. “그분들께 뭘 하고 사는지 물었을 때 하나같이 사는 게 무료하다는 대답이 나왔어요. 그럼 뭘 원하느냐, 넥스트 럭셔리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조사를 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모두가 온전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진짜 럭셔리라고 답하더군요. 아이가 크는 걸 온전히 보는 삶. 정말 다 이렇게 대답했어요.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 시간이 만들어내지 않으면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 이게 정말 럭셔리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너무나 무료한 사람들에게 아이들과 함께 올 수 있는 재밌는 장터를 만들어주자는 생각이 SSG 푸드마켓을 낳았고, 이 식료품점은 예상 객단가를 훨씬 뛰어넘으며 대히트를 쳤다.
일곱 살 아들 태오를 키우는 김 대표는 넥스트 럭셔리의 관점에서 볼 때 “아주 후지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엄하고 예민했던 작가 아버지와 어린 아들, 남편, 어머니가 한 달간 함께 여행을 다니며 가족애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프랑스 프로방스, 작년에는 이탈리아 투스카니를 다녀왔고, 올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난다. 여행을 다녀오면 여행기를 책으로 펴내는 아버지 덕분에 행복하고 깊이 있는 추억이 넘친다.
비 마이 게스트는 이제 사업분야가 넓어져 레스토랑은 거의 컨설팅하지 않고, 뷰티나 한류 등의 브랜딩 프로젝트를 더 많이 맡고 있다. 3년 전부터는 한남동 회사 1층에 아티초크라는 미술작품 포스터 샵을 열고, 누구나 아니쉬 카푸어나 도널드 저드를 방에 걸어놓을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일상의 사치’라는 사업 철학의 소산이다. “나도 살 수 있다, 나도 갈 수 있다, 이 마음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이 좋아요.” 사치는 대체로 나쁘다. 그러나 이런 사치라면, 그 사치는 옳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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