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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스승의 길, 제자의 길

입력
2015.05.1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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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노론 일당독재가 시작되면서 학문의 자유가 크게 억압되었다. 성리학, 즉 남송의 주희(朱熹ㆍ1130~1200)가 집대성했다는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은 이단으로 몰렸다. 주희가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四書)에 주석을 단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를 외우는 것이 학문이 되었다. 심지어 공자와 맹자의 말씀보다 주희의 해석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본말전도 현상까지 발생했다.

이런 상황은 중국과도 크게 다른 것이었다.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ㆍ1472~1529)이 주희를 비판하는 새로운 유학인 양명학(陽明學)을 연 것은 16세기 초였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가장 큰 차이는 사민(四民ㆍ사농공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었다. 주자학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의 신분 차이를 하늘이 정해준 천경지의(天經之義)라고 본 반면 양명학은 사민평등을 주장했다.

왕양명은 “옛날 사민은 직업은 달랐지만 도는 같았으니(異業而同道)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점에서 동일하다(‘절암방공묘표(節庵方公墓表)’)”라고 말했다. 정치도 사대부 계급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 중에서 능력 있는 자가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양명학이 조선에 들어온 직후 퇴계 이황(李滉) 등에게 “사문(斯文ㆍ주자학)의 화(禍)”라며 이단으로 몰린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었다. 유학의 종주국 명나라에서도 이단으로 몰리지 않았던 양명학이 조선에서 이단으로 몰린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명학자라고 자처하고 나선 인물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ㆍ1649~1736)였다. 정제두는 ‘대학서를 이끄는 글(大學序引)’에서 ‘육경(六經)의 글은 해와 별같이 밝아 아는 사람이 보면 절로 환한 것이라 주해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훈고(訓?)만 있고 주설(注設)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주자(朱子)가 물리(物理)로써 해석을 하게 되니 주(注)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옛 경전이 변한 까닭이다. 주자의 해석이 경문(經文) 본래의 뜻을 어겼으니 또 고쳐 해설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주희의 경전 해석이 틀렸다고 비판했다.

주자학 유일 사회에서 주자를 공개 비판했으니 당연히 물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제두는 61살 때인 숙종 35년(1709)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다. ‘하곡선생연보’는 “이 해 장손(長孫)이 요사(夭死)하자 몹시 슬퍼해서 선조들의 묘와 가까운 곳으로 이주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학문의 자유를 얻기 위한 뜻이었다. ‘연보’에는 정제두가 서울에 살 때도 문하에 배우고자 청하는 자가 ‘약간’ 있었다고 말할 정도니 강화도로 이주한 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때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배운 인물이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ㆍ1705~1771)였다. 이광사는 만 50살 때인 영조 31년(1755)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생을 마치는데, 당대 최고의 명필로 유명했다. 동시대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ㆍ1786~1856)가 청나라 화풍에 민감한 필법이었다면 이광사는 조선 전통 필법인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했다. 이광사 묘비에는 하곡이 세상을 떠나자 상복을 입었다는 글귀가 나온다. 이후 양명학은 정제두의 제자 이광명(李匡明)과 손자사위 신대우(申大羽) 등 일부 소론계 인사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가장 먼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들이 강화학파라고 불리는 양명학자들이었다. 하곡 정제두의 6대 종손인 정원하(鄭元夏ㆍ1855~1925), 이계 홍양호의 5대 종손인 홍승헌(洪承憲ㆍ1854~1914), 영재 이건창의 아우인 이건승(李建昇ㆍ1858~1924) 등이 만주 유하현 횡도촌(橫道村)으로 망명했다. 이들은 국난(國難)에 함께 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란 스승의 유훈을 실천하다가 이역만리에서 쓸쓸하게 생애를 마감했다.

해방 후에도 조선총독부사관을 추종하는 식민사학이 역사학계의 주류가 되는 역주행 속에서 이들은 이름조차 지워져 있었다. 필자가 강화도 양도면의 정제두 묘소를 처음 찾았던 십 수 년 전만 해도 폐허나 다름없었는데, 이제는 묘역도 정비되고 주차 공간도 생겼다. 그리고 이들 양명학자들을 기리는 모임도 몇 곳에 생겨났다고 들었다. 한 지식인이 학문의 자유를 택해 스스로 귀양길에 오르면서 걸었던 길이 이렇게 뒤늦게나마 스승의 길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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