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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1년 후

입력
2015.05.1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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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것이 ‘시간’이라고 했다. 모든 허위는 시간 앞에 무력하여 결국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2004년 4월 15일 초유의 대통령 탄핵 정국을 지나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개표가 상당히 진행된 늦은 밤, 당시 열린우리당 선거상황실을 취재하던 기자가 신기남 선대본부장에게 소감을 물었다. 탄핵에 찬성했던 추미애가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질 것 같다는 소식이 들리던 중이었다. 그는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목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지낸 이문열조차 “시대를 읽는 내 안목과 내 시대의 대중을 알아보는 내 이해력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됐다”라고 했으니 당시 상황을 ‘거대한 전환’으로 봤던 게 영 어처구니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독일관념론 같은 득의감 때문에 한동안 마음이 찜찜했다.

11년이 흘렀다. 당시 제2당으로 주저 앉은 한나라당 대표는 대통령이 됐고, 말실수를 딛고 과반석을 일궈낸 열린우리당 의장은 재보선에서 3등으로 낙선했다. 보수 신문조차도 한국 정치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왔다며 관심 있게 다루던 민주노동당의 주류는 몇 번의 핵분열을 거쳐 헌법재판소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았다.

11년이란 시간이 야권의 분열적인 민낯을 드러냈다는 말이 아니다. 노무현과 북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야당-진보 세력 내의 분열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 분열은 비가역적인 경험과 역사적 기억에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각각의 역사들이 없었다 하더라도 인간 집단 내에서 작은 무리들이 출현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은 주로 자신과 비슷한 인간들에게서 친밀감을 느끼는데, 제한된 인지능력상 그 수가 작을 수밖에 없다. 초중고 학생들의 교실 네트워크를 조사해보면 30여명 남짓한 아이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작은 집단들로 분화한다. 그리고 이 같은 분열은 옆반과 축구 시합 같은 명확한 공동 이익 앞에서 쉽게 봉합되기도 한다.

11년의 시간이 드러낸 진실은 야당이 공동의 이익을 명확하게 설정할 수 없을 정도로 늙어 버렸다는 것이다. 야권 지지층의 연령대를 감안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겠지만, 사회조사자료 분석을 통해 드러난 진실은 이렇다. 2003년 이후 1960년대생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의 정치 성향은 그 차이가 통계적으로 항상 뚜렷했다. 하지만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진보적 자세와 북한에 대한 친밀감 사이의 동조가 급격히 무너졌다. 젊은 세대는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북한을 적대적인 국가라고 상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노년층과 젊은 세대 사이에 낀 60년대생들이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다. 60년대생, 즉 386세대는 북한에 대한 우리 사회 전반의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입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적극적인 세대이다.

하지만 야당의 386 정치인들은 자기 세대의 정치적 적극성을 대표할 만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11년 전 ‘천신정’의 나이가 된 이들이 여전히 수장의 등 뒤에 도열해 있는 사이 야당은 그만큼 늙어 버렸다. 50년대생 수장들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거나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유행가나 완창하는 이들에게서 젊음과 능력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NLL 논란에 대한 김종대의 평가는 야당의 이 같은 난맥을 정확하게 짚는다. 당시 야당은 상이한 의견들을 크로스체킹하여 사실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 “소설을 써버리면 나머지 전체가 다 바보가 되는 형국”이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의 생각을 발전시킨 70년대 조직이론이 있다. 사태 파악에 어둡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도 이해 못하는 조직 구성원들을 설명하는 이 이론의 이름은 ‘쓰레기통 (garbage can theory)’이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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