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없는 세상을 모르고 디지털 라이프에 길들여져
무능 무기력 무식으로 특정되는 세대
그러나 그들이 만든 다른 선택지,
불필요한 정보 하루 만에 사라지고 글 하단 '오호라' 누르면 시간 연장
디지털 시공간 새로운 생태계 구축
이종(異種)의 인터넷 ‘이더리움’의 개발자 비탈릭 부테린은 1994년생이다. 망각의 알고리즘이 작동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하루’의 개발자는 1998년생 한국 소년들이다. 이들은 중앙 집중화된 기존의 인터넷 환경과 사생활 보호가 안 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만족할 수 없었다.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데이터가 하루 동안만 저장되도록 한 하루는 잊혀질 권리, 검색되지 않을 자유를 보장한다. 태어난 이래 인터넷과 함께 살아온 이 세대가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세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1994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한국에서 인터넷이 없는 세상을 살아본 적 없는 세대다. 1997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법제화되지 않았던 시절을 체험하지 못했다. 2007년 이후에 태어난 지금의 어린이들은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을 모른다. 과거가 되돌아가야 할 이상적인 원형은 아니다. 다가올 미래를 미리부터 절망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를 둘러싼 사물의 질서를 태양이나 달이 뜨고 지는 것처럼 당연히 유지되고 반복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며, 낯설게 바라볼 단 한 번의 동기조차 갖지 못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다른 선택지는 지금보다 더 있었고 앞으로 더 많이 만들 수 있다.
인터넷이 없었던 세상,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던 시대를 모르는 세대는 과연 어떤 선택지를 만들 수 있을까? ‘빅 스위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유리감옥’의 저자인 니콜라스 카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인간은 디지털 라이프에 길들면서 급격한 인지 능력의 퇴화를 겪고 있으며,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악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세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전자자극의 흐름에 노출돼 있다. 유년기엔 어머니보다 기계로부터 더 많은 말을 배우고, 일평생 사람보다 기계와 더 많은 정보를 교환한다. 언어학습의 양식, 주의력의 리듬, 기억, 상상력 등에서도 이전 세대와 큰 차이를 보인다. ‘유리감옥’에서 니콜라스 카는 디지털 세대와 달랐던 아날로그적 장인(匠人)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회복해야 할 인간형이라며 숭앙한다. 미디어 격변기에 맞이한 인지적 위기를 경고하는 듯싶지만, 아날로그적 장인이 재생산될 수 있었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지지와 향수가 전제된 주장이다.
소비 강요하며 중독은 문제라니
디지털 세대에도 근대 국가 시스템이 요구하는 국민의 자질이 필요하다. 앞선 세대와 마찬가지로 근면 성실한 노동자가 되어야 하며, 유사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군인으로 징집돼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디지털 세대의 여러 특이성이 국민 만들기 공정을 교란한다. 니콜라스 카가 개탄해 마지않았던 디지털 세대의 무능, 무기력, 무식 역시 근대 국가의 시간 체제와 불화하기 쉽다.
이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중국 정부다. 청소년 인터넷 중독을 가장 큰 사회 위기로 규정한 중국은 인민군 산하에 인터넷 중독 치료센터를 운영하며 문제 학생들을 가둬놓고 교정 치료와 교육을 병행한다. 더불어 해외 사이트를 강제 차단하는 인터넷 검열 시스템도 강화하고 있다. 국민 만들기는 신체만이 아니라 미디어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국가가 틀어쥐고 있어야 원활히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ICT 생산 공장이 밀집해 있고, 인터넷 사용 인구만 해도 7억5,000만명에 달하는 디지털 대국이 중국이다. 중국 전체가 디지털 중독 상태다.
사실 디지털보다 무서운 중독증이 중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국가 중독과 자본 중독이다. 병원에 갇힌 청소년들은 국가와 자본에 덜 중독된 몸뚱이기 때문에 비정상 취급을 받는다. 청소년이 학교와 가정에서 매순간 최선을 다해 연마해야 하는 능력은 시장경제에서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생산력이다. 자본화될 수 없는 능력은 존재 자체가 부정되거나 병 들었다고 매도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란 언제나 양가적이며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디지털 신자유주의의 이율배반적 시스템은 사회 전체를 데이터 소비 중독 상태에 몰아넣으면서, 중독자의 신체가 비국민, 탈자본화되는 것을 잔인하게 억압한다. 이 위선이야말로 치료되어야 할 진짜 정신병의 실체다.
하루 지나면 지워지는 SNS
한국은 중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할 게 없는 사회다. 이런 세상에서 청소년기를 보낸다는 건 안쓰러운 일이다. 이 세대에게 앞 세대의 전범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것도 비루한 일이다. 이들이 만들어갈 미래는 익숙한 과거의 연장선이 아니라 누구도 살아 본 적 없는 다른 길이다. 그 길을 열어갈 낯선 능력들이 어디에 어떻게 잠재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진실로 경외감을 느껴야 한다.
2013년 말부터 서비스를 개시한 하루를 접했을 때, 소년들의 신선한 기획에 놀랐고 기대 이상의 완성도에 기뻤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이 아이들이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IT업계의 장사꾼들에게 주목받지 않길 바랐다. 그들은 솔깃한 아이템을 봤다 하면 돈으로 농락한 뒤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수익 모델이나 투자금 유치에 연연해야 하는 세계엔 마음과 몸이 충분히 단단해졌을 때 진입해도 늦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디지털 문화는 돈이 될 만한 사업이라는 구속복에 갇혀 있다.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잠재력이 상실되고 있는지 모른다.
올해 고교 2년생이 되는 1998년생 소년들(박성범?윤형근)이 개발한 하루는 빅데이터가 불가능한 SNS다. 두 사람은 기존 SNS의 정보 과잉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SNS의 기억 능력이 사용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제약할 수 있어야 한다. 잊혀질 권리, 검색되지 않을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SNS라면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기존 SNS에 접속하는 사용자들의 생활 방식은 의식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자동화된 관성에 고착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하루는 다른 선택지를 제시했다. 24시간 동안만 글이 유지되는 새로운 SNS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망각은 모든 소통에서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다. 인터넷과 인간의 공진화도 기억 기술의 발달을 넘어 망각의 기획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다르게 살기’에 대한 도전
하루에서 오래 갈 글의 가치는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유사한 ‘오호라’를 눌러서 유지할 수 있다. 불필요한 정보는 하루 만에 사라지고 가치 있는 정보만 지속한다. ‘하루’에서 글을 작성하면 작성한 글 오른쪽 위에 작성한 시간과 “24시간 남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생긴다. 작성한 글 하단에 ‘오호라’를 누르면 하루가 더 추가되었다는 문구가 나타난다. 하루의 또 다른 특징은 타임라인이 ‘친구들’과 ‘광장’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SNS의 개방성과 폐쇄성을 합친 설계다. ‘친구들’에서는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광장’에서는 먼 관계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 ‘광장’의 글은 하루면 사라지지만, ‘친구들’에서 나눈 대화는 일정 시간 지속된다. 하루의 개발자들은 사회적 시공간의 생태계를 디자인하는 법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10대 청소년들이 감행한 도전이다. 이들의 동년배들은 어른들이 정해놓은 시간 체제에 순응하며 학교와 학원, 시험장을 맴도는 수험생 생활에 갇혀 있다. 하루는 그들에게 시간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다르게 살고 싶다면 다르게 생산하고 다르게 소비해야 한다. 그 누구에게 대신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기에 어른들에게도 이곳의 의미는 각별하다. 여기엔 수익 모델 적용이나 투자자의 간섭이 없다. 이런 SNS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재기로 가득하다.
SNS가 빅데이터를 포기한다는 것은 사업성으로만 평가한다면 치명적인 약점이다. SNS가 사용자에게 별도의 요금을 부과하지 않고 기꺼이 공짜 서비스를 제공하는 까닭도 데이터 수취 때문이다. 사용자들이 SNS에 머무는 체류 시간과 데이터 소비는 사업 밑천이다. 이 사업은 궁극적으로 정보 가공업이자 마케팅 대행업인 것이다. 하루는 이 상식을 무시하고 아마추어리즘에 떳떳하다. 이것은 사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실천하려는 모든 시도는 아마추어들의 축제나 다름없다. 안 해봤던 일에 들떠서 서로의 도전을 격려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문화를 가꾸는 훌륭한 도구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선용될 수 있다.
임태훈·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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