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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다, 갯벌이 빚어낸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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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다, 갯벌이 빚어낸 소금

입력
2015.05.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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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부자만 먹던 귀한 소금

일제강점기 보급된 천일염에 밀려 완전히 사라졌다가 50년 만에 재현

'맛의 방주'에 등재되며 재조명… 외국인들이 더 많이 찾아

바닷물을 끓여 만든 태안자염은 입자가 곱고 염도가 낮아 순한 맛이 난다. 고운 가루가 입안에 퍼지며 퍼뜨리는 바다내음은 이내 달큰해진다. 소금굽는사람들 제공
바닷물을 끓여 만든 태안자염은 입자가 곱고 염도가 낮아 순한 맛이 난다. 고운 가루가 입안에 퍼지며 퍼뜨리는 바다내음은 이내 달큰해진다. 소금굽는사람들 제공

“옛날 태안 일대에선 맛있는 음식을 ‘부잣집 장맛 같이 맛있다’고 했어요. 부자들만 비싼 자염(煮鹽)으로 된장을 만들어 먹었거든. 아흔 넘은 우리 어머니도 자염에서 천일염으로 소금이 바뀔 때 그렇게 고생을 했다고 합디다. 자염 쓰다가 천일염으로 바꿔 먹으니 모든 음식이 다 쓰고 맛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14일 오후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금리 낭금갯벌. 엿새째 물이 들어오지 않아 바싹 마른 갯벌 위로 하얗게 소금기가 앉아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이곳은 전북 고창과 함께 국내 두 곳뿐인 자염이 생산되는 곳.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자염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먹던 천년 전통의 소금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보급된 천일염에 밀려 명맥이 끊겼다. 영농조합법인 소금굽는사람들의 정낙추(65) 상임이사가 2002년 5월 전통방식을 복원하는 데 성공해 상품화하기까지, 50년간 한국인의 밥상에서 사라졌던 소금이다.

‘맛의 방주’에 들어간 태안자염

음식 맛을 결정하는 최종 심급은 무엇일까? 신선한 식재료? 창의적인 레시피? 정성 어린 조리법? 모두 중요하지만 답은 아니다. 음식 맛을 결정하는 건 바로 간이다. 식재료가 썩 훌륭하지 않아도, 조리과정에서 약간의 과실이 있었더라도, 간만 잘 맞추면 그 음식은 먹을 만하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으로 선정되느냐 마느냐도 실은 간(드레싱)이 좌우한다고 설명하는 음식 전문가도 있다. 결국 궁극의 맛이란 소금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금은 오늘날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식재료다. 고혈압과 심장병, 신장질환에 비만까지 거대하고도 부정적인 의미망을 언제나 배후에 끌고 다닌다. 몸에도 좋으면서도 맛있는 소금에 대한 욕구가 터져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제염과 호주산 레이크 크리스털 소금, 일본 오키나와 소금 등을 병행 사용하던 웨스틴조선호텔이 2009년 6월 국내 호텔 최초로 전 객장에서 천일염을 쓰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건강하고 맛있는 소금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최현석 셰프가 운영하는 엘본 더 테이블은 스테이크에 녹차소금, 알래스카 소금 등 다섯 가지 소금을 내놓고 손님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국내 첫 레스토랑으로 화제를 모았다.

천일염이 건강소금으로 광범위한 호응을 얻어가고 있는 가운데 소금의 세계에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탈리아에 본부를 두고 있는 비영리기구 국제슬로푸드협회가 지난해 태안자염을 ‘맛의 방주’에 올린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빗대 만든 맛의 방주는 맥도널드와 코카콜라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가 전 세계인의 입맛을 획일화하는 데 맞서 멸종 위기에 처한 음식의 종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 1996년 시작한 프로젝트. 한국 음식으로는 지난해 처음 태안자염과 울릉도의 칡소, 섬말나리, 진주 앉은뱅이 밀 등 8개가 등재됐다.

부자들의 귀한 소금, 자염

일제 강점기에도 고급 소금으로 소량 생산되며 부자들의 밥상에 올랐던 자염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었다. 햇볕에 말린 갯벌흙에 바닷물을 투과시켜 함수를 만든 후 가마솥에 끓여서 추출하는 게 자염의 전통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활발했던 간척사업으로 갯벌 대부분이 염전이나 논으로 개간돼 버리면서 자염을 만들 수 있는 곳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태안 낭금갯벌은 간척사업 당시 밀가루를 빼돌린 인부들 덕분에 제방이 허술하게 조성돼 바닷물이 넘나들면서 기적적으로 갯벌이 살아남은 곳이라고.

50년간 명맥이 끊겼던 자염을 태안 낭금갯벌에서 전통 방식으로 재현하는 모습.
50년간 명맥이 끊겼던 자염을 태안 낭금갯벌에서 전통 방식으로 재현하는 모습.
소가 곱게 써레질한 갯벌흙을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조금 동안 말린 후 함수를 모으는 통자락을 설치한다.
소가 곱게 써레질한 갯벌흙을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조금 동안 말린 후 함수를 모으는 통자락을 설치한다.
자염의 염도를 측정하는 장면.
자염의 염도를 측정하는 장면.

하지만 이 같은 전통방식은 채산성이 매우 낮다. 영농법인 소금굽는사람들은 그래서 역발상을 시도했다. 갯벌흙에 바닷물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갯벌흙을 퍼다가 바닷물에 담그는 방식으로 공정을 현대화한 것. “그래도 많지는 않습니다. 바닷물 3톤을 8~10시간 끊이면 나오는 소금이 60~70㎏밖에 안 되니까요. 그걸 말려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포장을 하는 거죠. 아직은 가내수공업에 가까운 형태지만, 지난해 맛의 방주 등재 이후 외국 손님들이 어찌나 많이 찾아오는지….”

정낙추 이사는 “자염은 갯벌의 유기물질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고, 바닷물을 간장 졸이듯 뭉근히 끓이는 동안 불순물을 걷어내기 때문에 쓴맛과 떫은맛이 전혀 없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태안자염이라는 상표명으로 초록마을 등 친환경 유기농 식품업체에 납품되는 이 소금은 500g에 9,900원으로, 천일염 가격의 두 배 정도지만, 바다생명체의 사체가 천연 갯벌에 남긴 유기물질 덕분에 미네랄, 철분, 마그네슘, 칼륨 등이 풍부하다. 특히 칼슘은 천일염보다 14~21배 가량 많다.

이토록 순하고 달큰한 소금이라니

자염은 먹어 보면 놀랄 정도로 맛이 순하다. 천일염도 대부분 암염인 외국 수입 소금이나 정제염등과 비교해 먹으면 염도가 낮고 뒷맛이 달착지근하지만, 자염은 그 이상이다. 천일염과 나란히 놓고 먹어보면 확실히 소금 맞나 싶게 짠맛이 덜하고, 부드러우며, 뒷맛은 달큰하게 감칠맛이 난다.

“자염은 쓰고 떫은 맛이 없고, 짠 맛이 덜해 음식 고유의 맛을 살려주는 데 최고죠. 콩나물국을 끓여보면 알아요.” 오로지 콩나물과 물, 소금만으로 맛을 내야 하는 콩나물국은 요리의 기본기를 시험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음식이다. 태안자염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쓴 맛 나지 않는 콩나물국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소금’이다.

보통의 소금과 비교할 때, 태안자염은 소금간만 하는 탕 종류의 음식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 고기 기름장이나 생선 구울 때도 식재료 고유의 맛을 살려주는 마력을 발휘한다. 김치 담글 때는 특히 신통한데, 태안자염에 함유된 고함도의 칼슘이 배추의 세포벽을 구성하는 펙틴 분자들 사리에 다리를 놓아 섬유질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래서 김치가 신맛이 나도록 무르지가 않는다고 한다. 싱싱한 신 김치라니, 군침이 돌지 않는가.

태안=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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