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복지지원제도 대상 안돼
몰락한 중산층 기댈 곳 전무
극단적 선택 비극 막지 못해
“00아… 도저히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안 되기에 가족들과 함께 간다.”
지난 13일 부산 해운대구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해 숨진 채 발견된 송모(38)씨가 친구에게 남긴 유서의 첫 구절이다. 송씨의 집 거실에선 아버지(67)와 어머니(64), 누나(41), 조카(8)가 이불 위에 나란히 누워 숨져 있었다. 어른 시신의 발 아래에는 커피와 과일, 성경책 등이 놓여 있고, 조카 시신 아래 쪽에는 빨대가 꽂힌 요구르트와 과자, 음료수가 놓여있었다. 송씨가 투신 전 숨진 가족들을 위해 추모의식을 한 듯 했다. 경찰은 생활고로 인해 송씨가 가족들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생활고로 인한 ‘가족 살해 후 자살’은 주로 빈곤층에서 일어나지만 이 사건은 부산 최고의 부촌(富村)인 센텀시티 한 복판 44평의 고급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2010년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150만원인 이 아파트에 입주할 때에도 이들은 준중형 외제차 한 대, 준대형과 준중형 국산차 한 대씩 자동차 3대를 등록했다.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 5년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버지 송씨는 한 해운회사의 중역을 지냈고, 누나는 성악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일본 크루즈선의 요리사로 일하던 아들 송씨는 이 아파트로 입주하던 즈음 매형과 비철금속을 매입해 동남아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2년도 안 돼 사업은 실패했고, 매형과 누나는 이혼했다. 아버지 송씨는 허리디스크 수술 후 장애 5급 판정을 받은 상황이었다. 누나가 성악 강사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이 다섯 식구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모아뒀던 돈은 송씨 사업 자금과 생활비로 들어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송씨가 친구에게 남긴 유서에는 “너에게 피해를 주게 돼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다”라고 적혔고, 아버지 송씨 역시 유서에 “누님께 진 빚, 갚지 못하고 떠납니다”라고 한 것으로 미뤄 이들은 친구와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생활비를 충당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송씨 휴대폰에는 카드 빚 독촉 문자메시지도 여러 건 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1년6개월간 아파트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 2,000만원을 제하고도 625만원이 밀려있었다. 결국 이달 15일 집을 비워주기로 했고, 이틀 전인 13일 온 가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 가정은 사업 실패로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하루아침에 추락했지만 정작 사회적 시스템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빈곤층으로 추락한 중산층 가정은 저소득 가정보다 경제적ㆍ심리적 위기에 취약한 점이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가장의 사망이나 부상 등으로 갑자기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가구에 생계비와 주거비 등을 지원하기 위해 보건복지부가 ‘긴급복지지원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이 가정은 지원 대상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 재송1동 주민센터 담당자는 “이 가족은 긴급복지지원제도를 신청하지 않았다”며 “신청했어도 지원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활동을 하던 가족의 사망이나 가출 등 법에서 정한 위기 상황에 해당돼야 하는데, 월세가 밀렸다는 것만으로는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담당자는 또 “아버지 송씨가 허리디스크로 장애판정을 받았지만 송씨가 가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고, 기초연금을 받고 있었다”며 “지금까지 알려진 송씨 가족의 상황으로만 미뤄보면 사회 복지제도의 대상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긴급복지지원제도의 수혜 대상이 된다고 해도, 이 가정은 평생 중산층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복지 제도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또 공무원들이 직접 현장에서 긴급지원 대상자를 발굴하기도 하지만 저소득층이 밀집한 지역 중심으로 점검하기 때문에, 이 가정은 복지 지원 대상에 속할 가능성은 낮다. 결국 추락한 중산층을 보호할 사회 안전망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복지 공무원들의 재량을 인정하는 지원 시스템 정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중앙정부가 복지제도의 재정 누수를 막아 3조원을 아끼겠다고 발표하니 현장에 있는 복지 공무원들은 재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까다롭게 복지 대상자를 선정할 수밖에 없다”며 “복지 제도에서 ‘누락’되는 사람들은 보호받지 못해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업실패 후 자산과 소득이 전혀 없다면 당연히 긴급복지지원제도를 통해 지원해주는 게 맞다”며 “현 제도의 공무원 재량권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은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중산층이 사업에 실패하면 최소한 몇 개월이라도 거주할 수 있는 임시 주거를 제공해야 극단적인 선택을 막을 수 있고, 급속하게 빈곤층으로 떨어진 데 대한 심리적 타격 또한 커 심리 상담도 병행해야 하다”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부산=전혜원기자 iamjh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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