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장비 교체 요청·인사청탁 등 담겨
영국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찰스(66) 왕세자가 정부에 보낸 비밀 서한이 10여 년의 소송 끝에 13일 공개됐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왕실이 원칙을 깨고 국정개입을 시도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국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이날 공개된 서한은 총 27통으로, 찰스 왕세자가 2004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토니 블레어 총리와 존 레이드 보건장관 등 7명에게 보낸 것들이다. 알아보기 어렵게 휘갈겨 쓴 찰스의 필체가 흑거미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 ‘흑거미 메모’로 불린다.
서한에는 이라크전 군장비 교체 요청과 같은 중대 현안부터 왕세자 개인의 세세한 요구 사항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 특히 찰스 왕세자는 서한을 통해 자신의 건축재단이 연관된 병원의 재건축 승인을 요청하거나, 대형 슈퍼마켓 규제 담당자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앉혀달라는 개인적 부탁을 하기도 했다.
찰스 왕세자는 2004년 9월 블레어 총리에 보낸 서한에서 영국군이 사용하던 해상작전용 링스(Lynx)헬기가 높은 기온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등 문제가 있다며 이를 시급히 대체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대체 헬기 구입이 늦어지는데, 이는 영국군이 상당히 어려운 임무(특히 이라크에서)를 필요한 자원 없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국민건강보험공단(NHS)이 2004년부터 추진한 약초ㆍ침 인증 사업에도 대체의학에 오랜 관심을 보여 온 찰스 왕세자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찰스 왕세자는 2005년 2월 블레어 총리에 보낸 서한에서 “대체의학의 유해성을 이유로 약초를 불법화하면 영국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이에 비판적인 유럽연합 지휘부에 관련 이야기를 했다”고 밝혔다.
왕세자의 서한을 받은 관계자들은 왕실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잘 알면서도 공손한 태도로 대응했다. 블레어 총리는 “당신의 관점을 늘 소중하게 여기고 고대하고 있다”고 표현했고, 레이드 장관은 “정책을 빨리 실현하지 못해 용서를 구한다”며 “왕실의 가장 겸손하고 충실한 종이 돼 영광”이라고 답신을 보냈다.
이 같은 서한 공개는 2005년 영국 일간 가디언의 롭 에번스 기자가 정보공개법에 따라 소송을 제기, 10년 만에 대법원 승소 판결을 얻어내며 이뤄졌다. 가디언은 영국 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 소송 비용에만 40만파운드(약 7억원)을 지출했다며 “왕세자의 행동이 적절했는지 독자가 직접 판단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영국 왕실은 이날 성명을 내고 “왕세자가 나라를 깊이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그는 나은 영국과 세계를 만들기 위해 개인과 조직들을 돕는 데 헌신해왔다”고 밝혔다.
신지후기자 h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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