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정부는 과학기술 분야의 정책체계(거버넌스)를 대폭 고치겠다고 예고했다. 정부 과제 수주에 의존하거나 산업현장을 외면하는 연구기관에 예외 없이 구조조정을 진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날 미래창조과학부와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가 함께 발표한 ‘정부 연구개발(R&D) 혁신방안’에는 비효율을 개선하고 콘트롤타워를 강화하기 위해 미래부 내 ‘과학기술전략본부(가칭)’ 신설, 중소?중견기업 중심 R&D 지원체계 개편,‘과학기술정책원(가칭)’ 설립 등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이 포함됐다.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정부가 10~20년 전 모델을 반복하려 한다”며 “정부가 바뀔 때마다 과학기술 체계를 흔들었던 과거 선례가 되풀이될 것”이라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구조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과학기술전략본부 설치다. 현재는 과학기술 정책 수립?조정, R&D 예산 배분?조정 역할을 하는 국가과학기술심의회의 사무국이 미래부 내에 있고, 미래부 차관이 운영위원장을 맡다 보니 ‘선수’가 ‘심판’까지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또 국가 R&D를 종합적인 시각에서 보고 큰 틀의 추진전략을 세우는 컨트롤타워 기능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계속돼왔다. 이를 받아들여 국과심 사무국을 전략본부로 분리해 독립적으로 운영하며 국가 R&D 컨트롤타워로 삼겠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이 구조는 참여정부 때 과학기술부 내에 있던 과학기술혁신본부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R&D에 대한 정부 간섭이 커지고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며 혁신본부를 폐지하고 과학기술부를 교육부와 통합한 뒤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만들었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이마저 없애고 R&D 콘트롤타워 기능을 미래부에 넘겨줬다. 그랬던 박근혜 정부가 참여정부와 유사한 체계를 다시 들고 나오면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전략본부가 결국 참여정부의 혁신본부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미래부는 “방점이 다르다”며 부인했다. 최종배 미래부 창조경제조정관은 “부처별로 각자 R&D 예산을 써도 사업화 실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부분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신설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R&D 투자 자체에 무게중심을 뒀던 과거와 차이가 있다”며 선을 그었다.
참여정부 당시 혁신본부가 소속돼 있던 과학기술부는 장관이 부총리를 겸했다. 그만큼 ‘힘’ 있는 조직이었는데도 부처 간 R&D 조율이 쉽지 않아 정권이 바뀌자마자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물며 현 미래부 내에 설치될 전략본부가 아무리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해도 얼마나 강력한 컨트롤타워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이날 발표된 혁신방안에 따르면 과학기술정책의 뇌관 역할 수행을 목적으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일부 기능과 함께 과학기술정책원으로 통합된다. KISTEP과 STEPI는 원래 한 기관이었다가 정책연구와 평가를 동일 기관이 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에 따라 1999년 분리됐다. 과학계에서 정책원 역시 1990년대로 되돌아간 형태라고 바라보는 시각이 많은 이유다.
이번 혁신안에 따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생산기술연구원, 기계연구원 등 6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아예 ‘산업지원연구소’로 개편된다. 정부 연구과제 수주 비중을 줄이고 기업 지원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현재 평균 14.2%인 이들 기관의 민간수탁 예산 실적을 2018년까지 21%로 높이라는 구체적인 목표 수치까지 제시됐다.
이석준 미래부 제1차관은 “국가 R&D에 종합적 추진전략이 부족하고 시장과 무관한 ‘나홀로’ 연구가 많다는 현장의 지적을 반영했다”며 “과학기술 혁신이 신속하게 창조경제 성과로 이어지도록 올 연말까지 이번 혁신방안 실행을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전체 출연연 예산 4조6,000억원 가운데 정부 재원(출연금, 정부 수탁과제 포함)이 88.8%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출연연이 대학, 기업들과 함께 정부 과제 수주 경쟁에 매달리는 바람에 국가 차원의 R&D나 원천기술 개발 등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게 정부의 진단이다.
하지만 연구현장에선 “이미 R&D 사업화 성과 압박 때문에 고유의 연구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과학계 관계자는 “거버넌스마저 흔들면 연구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더구나 과거 정부가 폐지한 체계를 다시 도입하는 방안으로 혁신을 하겠다는 계획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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