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치마 두르고 부엌칼 잡은 지 두 달 남짓. 어버이날 부모님 밥상에 찜갈비 만들어 올릴 정도는 됐지만, 요리학원 문턱을 처음 넘던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식은땀이 난다.
지난 3월 9일 오후 7시 첫 수업 시간, 쭈뼛거리며 들어선 요리학원 조리실은 딴 세상이었다. 고등학교 교실의 1.5배 정도인 조리실에는 4인용 조리테이블이 9개가 놓여 있고, 벽장에는 부엌칼, 접시, 그릇, 냄비, 프라이팬, 체, 밀개, 가위 등 주방용기가 한 가득 들어 앉아 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평생 가야 한번 잡아볼 없다고 여겼던 물건들이다. 조리실 앞쪽 대형 냉장고에서 나는 ‘왱왱~’ 소리에 머리 속이 하얘졌다.
마치 있어서는 안될 곳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들 무렵, 수강생들이 들이닥쳤다. 예순아홉 최고령 할아버지 등 60대 남성이 두 명, 갓 오십 고개에 들어선 나를 포함해 50대 남성 두 명, 30대 중반 여성 한 명, 20대 미혼 여성 두 명, 모두 일곱이었다. 모두 학교와 병원, 기업체 등에서 일하는 이들로, 사연은 좀 달랐지만 미래의 쓸모를 위해 한식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하는 분들이었다. 막연히 “요리 한번 해 볼까”하고 나선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드디어 출석 체크와 함께 첫 수업이 시작됐다.
이날 배울 메뉴는 콩나물밥과 오이숙장아찌.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더니 한국 요리강좌도 밥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50대 중반인 여성 요리강사의 지론이었다. 레시피가 칠판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불린 쌀이 어떻고, 약불이 어떻고, 고기 채가 어떻고… 우리 말이 분명하건만 내게는 외계어처럼 느껴졌다. 조리시간이 각각 30분, 25분. 세상에나, 1시간 안에 두 가지 요리를 끝내야 한단다.
이날 난생 처음 내 손으로 밥을 지어봤다. “내 없으면 우짤라 카노? 밥 정도는 할 줄 알아야제. 전기밥솥에 물 눈금까지 다 표시돼 있다 아이가?” 아내의 숱한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왔던 나, 쌀 씻고 물 맞춰 앉혀 놓은 전기밥솥 버튼 몇 번 눌러본 게 고작이다. 그런데 이날은 가스 불에 냄비 밥을 지었다. 그것도 콩나물씩이나 넣어서 말이다.
조리법은 이랬다. 콩나물 꼬리 제거하고 소고기를 5㎝ 길이로 채 썰어서 파와 마늘, 간장, 참기름에 묻혀둔다. 냄비에 미리 불려 놓은 쌀과 물을 1대 0.9 비율로 넣는다. 보통 불린 쌀과 물은 1대 1 비율로 넣는다는데, 콩나물 수분을 감안한 수치란다. 이어 양념고기를 넣고 약불에 12∼15분 올려둔 뒤 불 끄고 뜸 들이면 완성.
오이숙장아찌는 오이를 길이 5㎝, 폭 0.5㎝ 크기로 껍질을 채썰어 소금에 절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따뜻한 물에 표고버섯 불리고, 파 마늘을 다진다. 표고에는 후추를 넣지 않고, 고기는 채 썰어 양념한 후 센불에 오이, 표고버섯, 고기 순으로 볶는다. 다 되면 실고추와 깨소금을 고명으로 얹어 접시에 담아내면 된다.
먼저 강사의 시연. 주의사항을 일러주면서 두 가지 요리를 하는데 시간이 딱 맞아 떨어진다. 맛을 본 수강생들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다들 요리 초보인가보다. 위안이 된다.
이제는 수강생들 차례다. 파 마늘 다지기부터 난제였다. 방망이로 몇 번 찍어 으깨면 될 터인데, 일일이 가로 세로로 칼집을 내고 칼로 썬 후 다져야 한단다. 그래야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한다는 설명. 마늘 다지는 것이 무슨 조각품 하나 빚어 내는 것 같았다.
적당히 잘라 고추장, 된장 찍어먹던 오이를 속은 버리고 껍질로 요리한다는 것도 낯설었다. ‘고민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런데 이 놈의 오이가 제대로 깎이지 않는다. 5㎝ 길이로 토막 낸 오이의 껍질을 돌려 깎아야 하는데, 자꾸 빗나가 껍질이 두 동강 나버리고 두께도 둘쭉날쭉 제 멋대로였다. 어릴 적 ‘과일 껍질을 잘 깎아야 연애 잘 한다’는 속설을 좇아 가끔 사과를 깎아 봤지만 작은 과도로도 다 깎아놓은 사과는 못난이 감자 꼴이 되곤 했다. 그런데 부엌칼로 돌려 깎으라니 말 다했다.
콩나물 꼬리를 떼고 있자니, 어릴 적 ‘콩나물 먹으면 키 큰다’는 어머니의 감언이설에 속아 나물이며 국이며 참 많이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좀 커서는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았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오후 9시 30분쯤 조리를 마치고 숙제검사 차례였다. 생긴 꼴부터 엉성했다. 아니나 다를까, “밥이 되다” “콩나물밥에 콩나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오이 굵기가 들쭉날쭉하다”는 지적이 줄줄이다. 이어진 시식 시간. 수강생들 입에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첫 수업 첫 요리의 맛이 궁금한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 아니겠나. 예상 외로 꿀맛이었다. 제 손으로 만든 음식 맛 없다고 하는 수강생은 아무도 없었다. 늦은 저녁 시간인지라 시장이 반찬이었던 게다.
허기가 가신 뒤에야 칠판에 무슨 암호 같은 글자가 눈에 띄었다.‘파마간참후깨설.’ 한참 설명을 들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살짝 휴대전화를 꺼내서 포털 지식검색에 도움을 청해봤다. 없었다. 모르면 묻는 것이 학생의 미덕. 강사가 “내 그럴 줄 알았다”며 픽~ 웃는다. “불고기 요리할 때 들어가는 양념이잖아요. 파, 마늘, 간장, 참기름, 후추, 깨소금, 설탕!.” 적기 좋고 외우기 좋게 약자만 따서 써 놓은 것이다.
또 물었다. “선생님, 간장도 종류가 많던데요. 무슨 간장입니까?” 난 그날까지 집간장과 양조간장을 구분하지 못했다. 조리할 때 쓰고도 뭔지 몰랐는데, 양조간장이 정답이란다. 가끔은 간장 대신 소금을 써 ‘파마소참후깨설’이 되기도 한단다. “언제 소금을 쓰는데요?” 묻기는 잘 한다. 강사가 소금을 써야 하는 음식 종류를 줄줄이 읊었는데, 고개만 끄덕일 뿐 도통 입력은 되지 않는다. 질문도 내 수준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이다.
강사는 앞으로도 양념 이름이 끊임없이 나온다며 큰소리로 따라 읽으라고 한다. “파마간참후깨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계속 읊어댄다. 이대로만 따라 하면 멋진 요리사로 뚝딱 변신하는 주문이라도 되는 듯이. “파마간참후깨설, 파마간참후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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